소설

농부 아들

日陵 2025. 9. 8. 16:45

 

고구마 6남매

6월의 이글거리는 붉은 태양 밑에서 고구마밭에 올라오는 풀을 매다 잠깐 숨을 고르려 그늘 가리개로 만들어 놓은 움막에 들어왔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수건으로 훔치고 그늘막에 앉아 피곤을 잃고자 소주 한 잔을 입에 부어 넣고 방금 따온 방울토마토를 바짓가랑이에다 썩썩 문질러 씹어 먹는다. 이렇게 마시는 소주 한 잔의 맛과 토마토 맛은 아무나 느끼는 것이 아니다. 농부만이 느낄 수 있는 천하의 진미가 아니겠는가? 입안에 맴도는 향긋한 맛을 느끼며 넋 잃은 표정으로 이글거리는 태양을 바라보며 내 심정을 그려 본다.

 

뙤약볕 내려 솟는 이른 여름 어느 날

개미허리로 일구어 놓은 내 농작물이

땡볕에 그을려 죽을까 봐

가냘픈 스프링클러 하나 설치해 놓고

가뭄을 달래는 어설픈 마음

 

쓰러져 가는 움막에 태양 볕 가리고

녹색 짙어 가는 블루베리 나무를 쳐다보다

문득 고개 들어 하늘을 보니

티 끝 하나 없는 청잣빛 하늘이

내 마음을 무지개 속으로 끌어들이네

 

살아온 인생 칠십 짧고도 길건만

엉켜버린 명주 실타래처럼

뒤엉킨 내 인생길이

얻지도 이다지 힘들기만 한가

 

훨훨 타오르는 태양 볕 불 속에

한 마리 불나비가 되어

이내 심사 던져 버린다면

세상사 다 잊혀버린 석가모니 될 너나

 

이렇게 신세타령을 하다 보니 내가 살아온 지난날의 추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사람마다 누구나 잃어지지 않는 추억이 있겠지만 나의 어린 시절은 유독 험난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중에서도 가장 생생한 것이 오늘날 나를 있을 수 있게 만든 암소가 있었다. 그 암소는 우리 집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으며 내가 대학까지 나올 수 있는 돈을 만들게 해 준 순하면서도 일을 잘하는 누렁이 암소였다.

우리 집이 소와 인연을 맺은 것은 내가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하면서부터였다. 그 당시 농촌에서 중학교에 간다는 것은 행운아들이다. 초등학교에서 한 학급 학생이 60명인데 그 중에 반수만이 중학교 입학 전형에 응시했으며 응시생 중에서 반이 합격했으니 한 반에 15명 정도만 중학교에 다닌 샘이다. 결국, 학생 수의 반은 집안이 가난해서 원서조차 내보지 못했고 원서를 낸 학생 중에서도 반은 실력이 모자라 중학교에 가지 못한 것이다. 하긴 여학생은 여자가 무슨 중학교에 가냐고 대부분의 부모가 학교를 보내지 않았던 시절이다. 이처럼 어려웠던 시절 나는 큰아들이란 귀속적 지위를 가지고 태어난 덕분에 어려운 가정인데도 부모님이 중학교를 보내 준 것이다.

 

우리 집은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사정이 있어 젊은 부모님은 아들 둘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매일 남의 집 일을 해 주고 받는 품값으로 가정을 꾸려가는 어려운 형편에서 나를 중학교에 보내 준 것이다.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중학교에 보낸 것은 그분들 나름대로 배운 사람들에 대해 알지 못하는 한이 서려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런 우리 집에 행운이 찾아왔다. 힘도 좋고 열심히 일하는 젊은 부부에게 믿음이 갔는지 마을에서 밥술깨나 먹고사는 사람이 장래 송아지 한 마리를 준 것이다. 장래 소란 어린 송아지를 가져다 키워서 새끼를 나면 어미 소는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송아지는 기른 사람이 가지게 돼는 것을 말한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든 해 우리 집에 송아지가 들어온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 송아지 먹이 풀은 내가 책임을 진 것이다.

 

나는 학교에 다녀오면 매일 풀지게를 지고 소먹이 풀을 베어 나르는 사람이 되었다. 13 살 먹은 꼬마 아이가 베어 나르는 풀 짐이야 얼마나 되겠냐 만은 나름대로는 열심히 베어 날랐다. 이렇게 해서 우리 집에 소를 기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소를 키운 흔적이 지금도 내 몸에 남아 있다. 중학교 1학년 때 겨울로 생각된다. 여름에는 소먹이로 풀을 베어다 먹이면 되지만 겨울에는 볏짚이나 콩깍지 또는 고구마 줄기 말인 것을 작두로 쓸어 여물을 끓여서 먹인다. 평소 여물을 아버지와 내가 쓰는데 그때마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꾸중을 듣곤 했다. 힘 있게 작두를 밟지 못한다고 꾸중을 들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여물을 썬다는 것은 나에게 힘들고 고된 스트레스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때 여물을 끓이려고 마른 여물을 퍼로 가서 보니 하나도 없었다. 부모님은 남의 집 일을 하러 가셨으니 늦은 시간에 오시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초등학교 4학년인 동생과 여물을 썰기로 한 것이다. 나는 작두에 앉아 짚을 작두에 넣고 동생은 작두를 밟는다. 중학교 1학년인 내가 작두를 밟아도 잘 썰어지지 않는 짚단이 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밟으니 제대로 썰어질 리가 없다. 동생에게 작두를 들라고 하고 작두날이 닿는 곳에 끼어있는 지푸라기를 빼기 위하여 내 왼손을 작두 안에 집어넣는데 동생은 짚은 넣는지 알고 작두를 밝은 것이다. 나는 순간 ~’ 소리를 지르자 동생이 깜짝 놀라며 작두를 들었는데 내 왼쪽 엄지손가락 마디에서 피가 뿜어 나온다. 엄지손가락을 감싸 다음 헝겊을 찾아 싸매고 보니 손바닥과 엄지손가락 첫마디에 상처만 나고 손가락은 잘려 나가지 않았다. 만약 동생이 조금만 힘이 더 있었다면 내 왼쪽 엄지손가락은 영원히 나와 작별할 뻔했다. 이 흉터는 6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초승달 모양으로 남아 있다.

 

이렇게 시작된 소먹이는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계속되었다. 봄만 되면 이 골짝 저 골짝 헤매며 논둑이나 밭둑 또는 개울가 풀을 베어 나르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뱀도 만나 깜짝깜짝 놀라기도 하고 왼손의 손가락은 낮에 베어 흉터와 상처투성이가 끝일 날이 없었다. 풀베기에 서투른 나는 상처가 아물기 전에 또 베니 특히 검지와 중지 손가락은 성할 날이 없었다. 이렇게 상처가 나는 이유는 아직 나이가 어려 풀을 잘 베지 못하는 데도 있지만 학생이 학교에서 돌아와 짧은 시간에 많은 풀을 베려고 서두르다 다치는 경우가 많았다. 어쩌다 학교에서 방과 후에 영화라도 한 편 보여주는 날이면 그날은 어둑어둑해지면서 지게를 지고 나가니 정신이 있을 수가 없다. 또 비가 오는 날은 어떠한가? 비를 흠 뿍 맞으며 베어서 짊어진 지게 무게가 장난이 아니며 어쩌다 논둑을 잘못 디뎌 미끄러져 넘어지기라도 한 날은 어린 나이에 눈에서 눈물이 고인 것이 몇 번인지 알 수 없다. 이런 꼴머슴 애환을 누가 알겠는가.

 

어쩌다 학교에서 너무 늦게 끝나던지 여름 장마철 오후에 소나기 비가 그치지 않으면 그날 우리 집 소는 굶주려야 했다. 이야기책에서 나오는 '비가 오는 날 풀 짐을 지고 소를 몰고 가는데 바지는 가랑이로 내려가고 소는 날뛰는 꼴머슴의 황당한 모습' 그 이야기 주인공이 바로 나였으며 그런 일이 종종 나타났다.  이렇게 소먹이 풀을 베어 나르는 꼴머슴이 된 나는 짧은 시간에 많은 풀을 베려고 노력하다 보니 풀 한 포기라도 더 쥐려고 오른 손가락을 뻗치고 또 뻗친 결과 왼손과 오른손 뼘이 서로 다른 짝 뼘이 되었다. 오른손은 낮을 잡는 손이라 뼘이 23cm 정도인데 왼손 뼘은 25cm 2cm나 더 늘어난 것이다. 하긴 되 바쁠 때는 손가락에 풀을 감고 또 감아 풀한 주먹이 한 다발이 될 수 있도록 쥐는 법도 배우게 되었으며, 엉터리 풀이지만 30~40분에 한 짐을 베기도 하였으니 꼴머슴 중에 상 꼴머슴이 된 것이다. 이런 나는 지금도 풀베기나 낫질은 일가견을 가지고 있다.

 

이런 꼴머슴이다 보니 풀에 대한 애환이 많을 수뿐이 없었다. 중학교 3학년 때로 기억된다. 국어 시간에 글짓기를 한 적이 있다. 동요나 산문이나 시 등 자기가 좋아하는 글을 쓰는 시간이었다. 나는 산문을 선택했다. 계절이 봄이었나 내가 선택한 주재는 풀이었다. 풀에 대한 의인법을 사용하여 풀이 추운 긴 겨울을 땅속에서 이겨내고 따뜻한 봄을 기다리다 봄이 되자 힘들게 땅을 헤집고 나와 노란 새싹에 힘을 불어넣어 힘차게 자라려고 하는데 어디서 싹싹 소리가 나 살펴보니 앞에서 꼴머슴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자기 동료들을 베어가는 장면을 보고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는 장면을 연상하는 글을 썼다. 내가 글을 다 작성하자 옆에 있는 짝꿍이 읽어보고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냐고 너무나 멋지다고 칭찬해 주었는데 다음 국어 시간이 문제였다.

 

우리 국어 선생님은 젊은 분으로 얼굴에 흉터가 길게 나 있고 화를 내면 얼굴이 붉어진다고 하여 별명이 찢어진 핏대였다. 그분의 특징은 학생들 놀이기를 좋아한 모양이다. 지난번 국어 시간에 쓴 글짓기한 작품들을 가지고 와 잘된 작품과 못된 작품을 지적했다. 잘된 작품으로 시를 쓴 한 학생을 일으켜 세우더니 지그시 눈을 감고

뒷동산에 붉은 장미가 한 송이 피어 있다라고 낭독을 하고 나더니 감탄에 젖은 목소리로

어쩌면 이렇게 멋진 시를 생각했냐.”며 시를 지은 학생에게 칭찬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리고 다음은 나를 가르치며

김만복 일어나 하더니

이게 글이냐?”

어떻게 풀이 세상에 나온 것을 좋아하고 사람을 보고 무서워하냐.” 하면서 창피를 줘도 너무나 준다. 나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그 후 나는 그 선생님만 보면 시선을 피한 기억이 남아있다. 이 생각이 떠오르다 보니 그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또 하나 떠오른다. 글짓기 사건이 있고 난 뒤 얼마 있다가 1학기 중간고사를 보았다. 국어 시험에 반대말 쓰기가 문제로 나와 있었다. 문제는 장가의 반대말을 쓰는 것이었다. 아마 정답은 장가(긴 형식의 노래)의 반대말은 단가인 모양인데 나는 단가가 떠오르지 않고 시험 시간이 끝날 때까지 생각하다 끝나기 직전 결혼식의 신랑 신부를 연상하며 남자가 장가를 가고 반대로 여자는 시집을 간다고 생각하여 시집이라고 답을 적었다. 이렇게 답을 적어 놓고 다음 국어 시간에 마음을 얼마나 졸였는지 모른다. 분명 선생님이 지난번 시험에 김만복은 장가가고 싶어 장가의 반대말을 시집이라고 적어서 냈다고 놀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 생각까지는 못했는지 다른 학생들의 답만 가지고 학생들을 놀려대고 나는 그냥 넘어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밭둑에 우거진 풀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같이 풀이 많으면 풀 베는 일이 힘들지 않을 것 같은 데 그때는 어쩌면 그리 풀이 귀했는지 모르겠다. 사람이 가난하게 살면 풀들도 제대로 크지 못하는 모양이라는 생각을 하며 조금 전까지 이글거리는 태양 볕 아래서 밭고랑에 제멋대로 자라는 풀을 뽑고 뽑아도 끝이 없이 자라나는 풀을 생각하며 중학교 때 선생님의 놀림에도 정신을 못 차렸나 잡초에 의인법을 인용하여 내 인생의 신세를 한탄하는 내 이름은 잡초라는 시를 지어 본다.

 

내 이름은 잡초

 

옛 아낙의 호밋자루 한숨 피우고

어설픈 햇병아리 농부 가슴에

피멍 들게 하는 잡초

 

아무리 짓밟아도 되살아나고

나를 무시하는 인간이 싫어

태어나고 또 태어나는 내 이름은 이름 모를 잡초

 

한 해가 시작되면 새롭게 태어나

한 해가 마무리되면 삶을 마감하는

영원한 생명 내 이름은 잡초

 

 ~ ~ ~

삶의 허무함 한포기 잡초려니

한 번 왔다 가는 세상 넉넉히 살다 가리라

 

우리 집은 내가 중학교 3학년 때부터 2년 동안 아버지는 우마차를 끌었다. 봄에서 가을까지는 농사일하시고 추운 겨울에는 새벽 4시만 되면 아직 날이 새지 않은 깜깜한 밤중에 일어나 5시만 되면 우마차를 끌고 우리 집보다 더 시골로 나가 인삼밭에 사용하는 통대(인삼밭을 꾸미기 위한 지주나무) 또는 발(인삼밭 해가림 덮개)을 사다 파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쇠죽을 끓이는 나와 아침을 준비하는 어머니는 세 시 반이면 일어나야 했다. 추운 겨울 새벽 쇠죽을 끓이기 위하여 여물을 나르고 쇠죽을 퍼다 주는 일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겨우내 이어지는 이 일은 정말로 하기 싫었다. 그러나 도시락 하나 싸서 눈보라와 추위를 이겨가며 하루 진종일 100여 리를 걸어 다니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어머니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기 싫어하는 아들을 위하여 내가 나오기 전에 먼저 쇠죽 끌일 준비를 다 해놓는 날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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