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넋노코 걷다 보니 언듯 걷는 것도 내 팔자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날의 내 인생을 돌아보니 걷는 데는 쾌 일가견이 이었던 것 같다.
아마 내가 최초로 장거리를 걸은 것은 여섯 살 일 때 같다.
세 살 만은 사촌 형하고 주천면 용덕리에서 금산읍을 걸어간 것이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여름 어느 날 사촌 형이 금산에 살고 있는 외갓집을 데려다준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허락을 받고 아홉 살 배기와 여섯 살 먹은 나는 자그마치 16km가 되는 외갓집을 향하여 땀을 펄펄 흘리며 간 것이다. 허긴 가는 도중에 사촌 누나가 살아 하루 저녁 자기는 했지만 비포장의 신작로를 걷고 또 걸어 금산읍을 왔는데 마침 그날따라 장날이라 시장통에 사람들이 쾌 복잡하였다. 우리는 외갓집으로 가기 전에 시장 구경을 하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아이스크림(오늘날 하드 종류) 공장 앞에서 형을 잃어버린 것이다. 촌놈이 최초로 아이스크림을 봤으니 신기하여 넋이 나간 모양이다.
나는 혼자 울고 있으니 누가 데려다주었는지는 모르지만 금산경찰서에 데려다줬다. 경찰서에서 마이크로 아이를 잃어버린 사람은 경찰서로 와서 찾아가라고 방송을 하는 소리가 지금도 내 귀가에 남아 있다. 경찰 아저씨가 누군가 방송을 듣고 나를 데리려 올 때까지 의자에 앉자 기다리는 말을 하고 자리를 비웠다. 나는 평소 순경 아저씨를 무서워하여 자리를 비운 사이 아무도 모르게 경찰서를 도망 나왔다. 외갓집이 큰 도로 옆에 붙어 있다는 기역만 믿고 날은 저물어 가는데 큰 길만 따라 걷었다. 얼마나 걸었나 외각으로 빠져나와 장을 보고 가는 시골 아저씨를 졸랑졸랑 따라간 모양이다.
늦게 알았지만 그 길은 금산읍에서 금성면을 통하여 전주로 가는 길이었다. 시골 아저씨는 졸졸 따라오는 나를 보고 어데 사냐? 아버지, 어머니, 큰아버지, 할아버지 , 외삼촌의 함자는 무엇이냐? 등등 말을 시켜보았다. 나는 또박또박 대답했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는 내가 귀여워 보였는지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얼마를 걸어 고개를 넘어가니 검문소(한국전쟁의 휴전 직후라 곳곳에 빨갱이를 색출하기 위하여 설치한 곳)가 나왔다. 그는 나를 검문소로 데리고 가려고 하자 나는 안 간다고 울며 버티자 검문소에 신고를 해놓고 나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 당시는 전화가 관공서나 있고 시골의 일반 가정에서는 볼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그다음 날 외갓집에서 외할머니가 와서 데려간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장거리를 걸은 것은 초등학교 일 학년 때 겨울로 생각된다. 그러니까 막 여덟 살을 먹던 겨울 어느 날 큰아버지와 같이 산 고개를 두 개나 넘어 금산으로 이사를 온 것이다. 새벽밥을 먹고 큰아버지를 따라 용덕리에서 역평리로 해서 하금천을 거쳐 금산읍 진악산에 있는 수리 미재를 넘어서 금산읍 읍지리라는 마을로 이사를 온 것이다. 추운 겨울에 자그마치 16km가 되는 길을 몸은 꽁꽁 얼은 체 걸어왔던 것이다. 지금의 내 머릿속에는 수리 미재를 올라 섰을 때 백부님이 산 아래에 있는 마을을 가리키며 저 마을까지만 가면 된다는 말을 해 주신 기억이 남아 있다.
그다음 많이 걸은 걷은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동생들의 학교를 입학시키기 위하여 본적지에서 호적 초본을 떼어 나른다든가 동생들의 출생신고 등을 20km가 떨어진 주천면사무소를 당일치기로 다닌 기억들이 남아 있다. 아마 중학교 일 학년 때부터 다닌 것 같다. 그 당시는 버스가 하루에 한두 대 정도 다녔으나 그도 돈이 없어 거의 걸어 다니는 시절이었다. 중학생이 장장 왕복 40km를 당일에 다녀왔으니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그때 걸으면서 먹던 연양갱 과자와 바나나 우유 맛이 생각만 해도 입안에 침이 고인다. 그리고 종종 명절 때나 할아버지 제사 때면 아버지를 따라 16km나 떨어진 고향을 찾곤 했으며 방학을 하면 큰집에 가서 사촌들하고 놀았던 기억들이 있다.
그러다 1962년 가뭄에 흉년이 들어 고등학교 1학년을 채 마치지도 못하고 10월에 학교를 그만두는 일이 나타났다. 중학교 일 학년 때부터 꼴머슴을 했던 나는 학교를 그만두니 집안일을 돕는 애기 농부로 변한 것이다. 겨울이면 낮에는 나무를 하고 저녁에는 머슴살이하는 친구 집에 찾아가 새끼를 꼰다든지 화투놀이를 했으며 봄부터 가을까지는 농사일을 거들어 준 것이다.
특히 금산이란 곳은 인삼을 재배하는 고장으로 인삼 밭을 꾸리기 위하여 산에 있는 나무가 제대로 자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나무가 무척 귀하여 나무를 하려면 도시락이나 누렁지 한 뭉치를 싸가지고 가까이는 왕복 6km, 멀리는 20km까지 가서 나무를 해 왔다.
나는 힘도 없는 것이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검 부적 나무는 하지 않고 잘 타고 화력이 좋은 싸리나무나 솔가지만 고집하여 남들보다 두배 내지 세배 먼 곳까지 가서 나무를 해 날랐다. 어머니에게 가시나무나 검 부적을 해다 드리기가 싫어 불이 잘 타고 때기가 좋은 싸리나무나 솔가지 나무를 고집한 것이다. 그리고 집 앞마당 구석에 나무 가리를 싸 올리는 것이 겨울의 취미가 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내가 나무를 하려 다닌 수리 너머재, 보티재, 큰 먹뱅이, 작은 먹뱅이, 저승재, 장자골, 활골, 상금리 앞산, 건천리 뒷산, 솔밭, 역평리에서도 더 가는 600 고지까지 골짝골짝 안 가본 곳이 없으며 머릿속에 기억이 생생하다. 죽기 전 그곳들을 한 번 더 가볼 수가 있으려나 ~~~.
그 유명한 나무꾼이 어른이 되어 중고등학교 교장까지 했으니 인생길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아마 나무꾼의 끈질긴 인내심이 오늘의 나를 만든 모양이다. 학교에 있으면서도 선생님들과 몸도 비실이(키 177,8cm. 몸무게 63kg 정도) 이면서 깡다구로 설악산 지리산으로 헤매고 다녔으니 걷는 것이 내 천성이 않인가?
그러다 퇴직을 하고 취미생활로 골프도 하면서 어릴 때 쓴 물 나던 농사에 취미를 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학교에서 퇴직하고 나니 특히 할 일도 없고 부모님한테 배운 것이 농사일이라고 농사를 지어보니 그리 재미 날 수가 없었다. 어릴 때 괭이자루를 들면 성을 간다고 괭이자루 집어던지고 아버지에게 혼깨나 나면서 공부를 했건만 나이 먹어 밭을 가꾸어 보니 이 얼마나 재미가 있는가?
내가 거름을 넣고 일구어 씨앗을 드린 곳에 파릇파릇 올라오는 새싹을 바라보다 보면 하루 해가 언제 갇는지 모르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혀 수확하는 재미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재미에 못지않게 재미가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거름을 내다 밭에 주저 안고 말았다. 허리에 병이 난 것이다. 참고 참으며 고집을 부리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한의원을 찾아가 침을 맞으며 계속 일을 하는데 통증이 가라앉지 않고 점점 기어 다니는 일이 많아졌다. 결국 병원을 찾으니 디스크 협착증에 디스크 파열이란다. 나는 디스크 파열이란 말에 겁이 나 그 즉시 입원하여 시술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시술을 받고 집에 돌아왔으면 사후 관리를 잘해야 하는데 의사 말이 가소로웠는지 여전히 헬스장에 가서 헬스를 하며 몸을 나부끼니 어느 날 갑자기 내 척추가 왼쪽으로 기울어져 버렸다. 즉 척추가 옆으로 휘어진 것이다. 나는 겁이나 시술한 병원은 돌파리라 생각하고 주변 사람들의 말을 따라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아도 보고, 척추 교정하는 곳에 다니며 치료를 받으면서 여전히 헬스장을 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그 결과는 병을 낫게 만든 것이 아니라 키운 꼴이 된 것이다. 그런 생활을 10여 개월하고 결국 대전에서 유명하다는 척추병원을 찾아 척추 협착증과 디스크 수술을 받은 것이다.
수술을 받고 나는 의사에게 내가 다시 이곳에 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자 그는 내가 지킬 내용을 간호원을 시켜 A4용지에 자세히 기록해 주었다. 내용은 3개월 간 앉지 말고 서서나 누워서 생활하고 매일 걷기를 꾸준히 하여 척추에 붙어 있는 속근육을 단련시키라는 것이었다.
나는 병원에서부터 허리에 피주머니와 무통병을 차고 병실 복도를 새벽, 아침 먹기 전 후, 점심 전 후, 저녁 전 후, 자기 전 등 하루 일곱 차례를 걷기 시작하였다. 아마 그 걸은 거름 숫자가 적어도 8,000보 이상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걷는 것을 보고 척추 수술 환자들이 너도 나도 따라서 하다 보니 식후에는 병실 복도에 걷는 수술 환자들이 북적 대었다.
퇴원 후에도 처음에는 아파트 주변을 시작하여 오전 오후로 나누어 일 만 보 걷는 것을 계속하다 어느 정도 허리가 튼튼해지자 새벽이나 또는 오전, 오후 등 계절에 맞추어 만보 이상 걷는 것을 생활화하였다. 명절이라고 쉬지도 않고 여행을 가도 걸었으며 그렇게 시작한 것이 내일 모라면 만 3년이 된다. 지겹게도 독하게 걸었다. 하루 만보씩 30년을 잡고 일 억보를 걷겠다는 것이 내 노년의 새로운 생활 목표라고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고 있다.
그렇게 걷다 보니 해외여행을 가서도 새벽에 걷다가 터키에서는 굶주린 개한테 혼난 적도 있고 스페인에 가서는 새벽에 걷는데 길가에 핸드백이 눈에 띄어 불량배들이 있지 않나 겁을 잔뜩 먹기도 하였다. 허긴 호찌민에 사는 딸 내 집에 가서는 오전 오후만 삼천 보씩 매일 걸으니 더운 줄도 모르고 시간을 잘 보낸 적도 있다.
그러다 지난해부터는 내 허리에 찬 만보기에 숫자가 매일 얼마나 나오나 확인해 보기로 하였다. 책상 위에 올려있는 달력에 매일매일 저녁마다 기록해 보니 일 년 동안 총 걸은 숫자가 4,707,374가 되었다. 하루 평균 12.897 보를 걸은 것이다. 이와 같이 기록을 하다 보니 욕심이 생겨 자꾸 더 많이 걷게 된다. 금년 일월에 걸은 숫자는 469,312 보로 나타났으며 오늘도 200,375 보를 걸었다. 이대로 가면 금년은 오백만 보를 훌쩍 넘겨 육백만 보도 도전해 볼만할 것 같다.
이렇게 걷다 보니 허리는 물론 다리 근육이 단단하여 지리산 천왕봉은 한차례 정도 숨을 돌리면 오르게 되었다. 지난해 10월에는 큰딸 아이와 같이 네팔에 있는 히말리아 트레킹을 했는데 5박 6일이나 6박 7일이 걸린다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 해발 4,130m)를 늙은이가 3박 4일 만에 거뜬하게 맞히었다.
금년의 목표는 오백만 보를 걷는 것이 목표인데 혹시 무리는 안 인지? 늙은이의 어리석은 자만 일런가?
오늘도 열심히 걷고 또 내일도 열심히 걸어야지.
아마 내 팔자가 걷는 데는 이골이 난 팔자인 모양이다.
2017.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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