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소리(수필)

유년 시절

日陵 2025. 9. 7. 15:49

 

  정초!

  날씨는 춥고 특별히 할 일도 없어 새벽 운동 후 몸이 나른하여 조금 쉬었다, 책상 앞 컴퓨터에 앉는다. 볼 것도 없지만 내가 그래도 조금이나마 관심을 두는 정치면과 스포츠면이라 뒤적거리다 컴퓨터를 끄려는데 바탕화면에 있는 사진 파일이 눈에 들어온다.

파일을 열어 무관심에 하나하나 훑어보다 재롱 장난꾸러기 손자 두 녀석의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한참 익살꾸러기인 초등학교 1학년에 다니는 둘째 녀석의 아들과 이제 6살인 셋째 녀석 아들의 익살스럽게 찍은 사진이 내 시선을 멈추게 한다.

  지난 10월 6일에서 8일까지 3일간의 연휴가 나타났다. 셋째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청양의 칠갑산 휴양랜드를 예약

해 놓았다고 저희 언니 내와 우리 식구를 초대했다. 칠갑산을 구경한 지도 몇 년이 지난 것 같아 각자 자기네 차를 끌고 2박 3일 즐겁게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아마 그때 칠갑산에 있는 출렁다리를 건너 산책을 했는데 호수 옆 산책로에 있는 호랑이상에서 사진을 찍은 모양이다. 나는 아들과 같이 산책에 빠져 익살꾸러기들의 익살을 보지 못했는데 사진 속을 드려다 보니 표정들이 너무나 밝고 천진난만하여 넋 놓고 보고 있자니 지난날 내 어린 시절이 떠 오른다.

  지지리도 못살고 어려웠던 나라. 내가 어린 1950년대를 회상해 보니 하나의 꿈만 같다. 일제 침략 속에서 근근이 해방되어 채 기쁨을 나눠보지도 못하고 동족상잔이라는 한국전쟁을 3년이나 치렀으니 그 후유증이 얼마나 많았을까? 어린 시절을 기억해 보니 머릿속에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아련한 추억이 몇 가지 남아 있다.

  우리 집은 운장산 줄기에서 뻗어 난 명덕봉이라는 산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용덕리라는 마을로 전라도의 지리산에서 운장산을 거처 충청도와 경계선인 대둔산으로 이어지는 산골 마을로 우리 집안이 중심이 된 김 씨 내 집성촌이었다. 130여 가구라는 시골 마을치고 제법 큰 마을로 할아버지는 이 마을을 호령하고 있었으며 지방의 유지로 향교에 나가기도 하는 김진사 댁이엇이다.

  내가 살고 있던 집은 고향에서 두 집이 생각나는데 한 집은 큰 백부님 댁과 울타리를 갓이 하고 있는 집으로 집 뒤에는 우리 집안 산인 조그마한 동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울타리 안에 자두나무가 있었으며 조그마한 개울물도 흐르고 있었다. 우물가와 집 앞마당 및 싸리문 근방에는 커다란 감나무가 있었는 데 우물가에 있는 것은 커다란 넙죽 감나무였다. 그리고 싸리문 쪽 행랑채에는 방이 있었으며 외양간이 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리고 두 번째 집은 큰 마을이라고 하는 아랫마을에 할아버지가 셋째 아들과 같이 살고 있는 집 옆으로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집이었다. 큰아버지 집과 접하는 곳은 울타리를 일부 만들지 않아 왔다 갔다 하면서 한 집같이 살던 집이었다.

  어머니 이야기로는 내가 태어난 곳은 할아버지가 사는 머릿방에서 태어났다는데 내가 살은 기억은 없고 어렸을 때 큰집에 돌러 가면 외양간 앞쪽 여물을 끓이던 사랑방이 이었는데 그곳인 모양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할아버지는 아들이 오 형제인데 장가를 가자 집을 한 채씩 다 장만해 주고 막내아들인 우리 아버지만 결혼 초 집이 없어 자기와 같이 사는 셋째 아들의 머릿방을 쓰게 하다가 둘째가 객지로 나가자 그 집을 막내에게 살게 한 모양인데 그 집이 바로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첫 번째 집인 모양이다. 이 집에 살 때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은 몇 살 때 일인지는 모르지만, 집 뒤의 자두나무가 있다는 것이 생각나고 우물가에 있는 넙죽 감 홍시가 맛있다는 생각이 난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새벽녘으로 알고 있는데 뒷동산에서 총소리가 나자 어머니가 이불을 뒤집어쓰게 하고  내 귀를 막아주시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몇 살 때 기억인지 모르지만, 어느 날 저녁 피난을 간다고 큰집 머슴의 지게를 타고 면 소재지로 피난을 가다 되돌아온 생각이 살아 있다. 또 하나 생각나는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을 때 큰집에서 할아버지와 같이 밥을 먹다 나보다 두 살 아래인 사촌 누이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낮은지 수저로 내 머리를 때려 피가 낫던 생각이 남아 있다. 

  나는 해방이 되고 그 다음다음 해로 1947년에 태어났다.  4살에 한국전쟁이 일어났으며 아버지는 막내아들로 형제 중에서 유일하게 군대에 입대하게 된 모양이다. 어머니 말에 의하면 아버지 바로 위 형님은 상당히 똑똑하여 약관의 나이에 마을 이장을 보고 있었는데 언제인지 모르지만 좌우익 싸움을 할 때 좌파 세력에 의하여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그리고 큰어머니는 모내기를 하다 쓰러져 어른들이 허둥지둥 업고 가던 모습이 내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 바로 위 형님 내외분은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며 그 큰집의 둘째 딸이 내 머리를 수저로 때린 것이다. 아마 아주 어린 나이였던 것 같고 엄마 아빠가 없으니 심통을 부린 모양이다. 그런가 하면 어느 날 저녁 산의 멧돼지가 집으로 들어왔다고 어머니와 같이 문고리를 잡고 있었던 기억이 있는데 어머니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하니 알 수가 없다.

  나의 유년시절은 부잣집 막내아들의 큰아들로 태어났지만 그리 행복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내가 태어날 당시 셋째 큰어머니는 나보다 보름 전에 딸을 났고 넷째 큰어머니는 딸만 하나 있고 아들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할아버지가 나를 무척이나 귀여워해 주셨지만 나이 어린 어머니는 한 부엌을 사용하는 두 분의 손위 동서들에게 눈칫밥을 먹었나 보다. 그러다 아버지가 군대에 가서 한동안 소식이 없자 할머니는 자기 아들이 잘 못된 것으로 착각하고 어머니에게 눈치깨나 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나에게도 당연히 눈칫밥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내 밑의 동생은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 아버지가 군대에 가 아버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머니가 밭을 매면 나는 밭둑에 있는 뽕나무 밑에서 동생을 보살피며 놀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이렇게 성장한 나와 아무런 부러움이 없이 갖고 싶은 장난감을 다 가지고 있는 손자 녀석을 생각하니 차이가 나도 너무 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해방되고 얼마나 발전해 왔는가 엊그제 TV에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인구비례로 세계에서 해외여행을 제일 많이 다니는 나라라고 하는 말이 떠오른다. 그런 나라에서 태어난 내 손자들은 당연히 행복에 겨워하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것이 언제까지 가는지 근심도 된다. 옛말에 부자는 삼대를 넘기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 나라에도 흥망성쇠가 있는데 못처럼 일으켜 세운 나라 다시는 내가 살아온 지난날 같은 어려운 시절은 돌아오지 말아야 하는데 생각하면서 두 녀석의 천진 남만 한 모습을 다시 한번 더 쳐본다.

  고 녀석들 참도 이쁘게 생겼네! 

  가지고 있는 재능을 마음껏 펼치고 마냥 행복하게 살 거라.

 

2018.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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