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꼴 머슴이 가져다 준 노년의 행복 (중)

日陵 2025. 9. 26. 16:32

 

 

수확한 땅콩 모습

 

 

이런 생각을 하면서 눈앞의 밭둑에 제멋대로 자란 풀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같이 풀이 많으면 꼴 베는 일이 그리 힘들지 않을 것 같은 데 그때는 어쩌면 그렇게 풀이 귀했는지 모르겠다. 사람이 가난하게 살면 풀도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모양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조금 전까지 이글거리는 태양 볕 아래서 밭고랑에 제멋대로 자라는 풀을 뽑고 뽑아도 끝이 없이 자라나는 풀을 생각하며 중학교 때 선생님의 놀림에도 정신을 못 차렸나 잡초에 의인법을 인용하여 내 인생의 신세를 한탄하는 내 이름은 잡초라는 시를 지어 봤다.

 

내 이름은 잡초

 

옛 아낙의 호밋자루 한숨 피우고

어설픈 햇병아리 농부 가슴에

피멍 들게 하는 잡초

 

아무리 짓밟아도 되살아나고

나를 무시하는 인간이 싫어

태어나고 또 태어나는 내 이름은 이름 모를 잡초

 

한 해가 시작되면 새롭게 태어나

한 해가 마무리되면 삶을 마감하는

영원한 생명 내 이름은 잡초

 

~ ~ ~

삶의 허무함 한 포기 잡초려니

한 번 왔다 가는 세상 넉넉히 살다 가리라

 

우리 집은 내가 중학교 3학년 때부터 2년 동안 아버지는 우마차를 끌었다. 봄에서 가을까지는 농사일하시고 추운 겨울에는 새벽 4시만 되면 아직 날이 밝지 않은 깜깜한 밤중에 일어나 5시만 되면 우마차를 끌고 내가 사는 마을보다 더 산골로 나가 인삼밭에 사용하는 통대(금산에서 인삼밭을 꾸미기 위해 사용하는 지주 나무를 말함) 또는 발(인삼밭 해가림 덮개)을 사다 파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쇠죽을 끓이는 나와 아침을 준비하는 어머니는 새벽 세 시 반이면 일어나야 했다. 추운 겨울날 새벽에 쇠죽을 끓이기 위하여 여물을 나르고 쇠죽을 퍼다 주는 일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겨우내 이어지는 일은 정말로 하기 싫었다.

 

그러나 도시락 하나 싸서 눈보라와 추위를 이겨가며 하루 진종일 100여 리를 걸어 다니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기 싫어하는 아들을 위하여 내가 나오기 전에 먼저 쇠죽 끌일 준비를 다 해놓는 날이 많았다.

 

이처럼 꼴머슴이 된 나에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소가 두 마리 있다. 한 마리는 암소로 송아지 때부터 내가 베어다 주는 풀을 먹고 자란 어미 소다. 성질이 온순했으며 우리 집을 부자로 만들어 준 소로 어머니와 나에게 특별히 정이 있어 오랫동안 기억하고 이야기하던 누렁이 암소다. 이 소가 우리 집을 부자로 만들어 준 것은 송아지를 나서 돈을 벌어도 주었지만 40대 초반인 아버지와 같이 우마차를 끌었기 때문이다.

 

이 암소와 나와의 관계는 족히 4년이 넘는 세월을 같이 살았다. 내 나이 13살 때부터 16살이 될 때까지로 기억되었다. 내가 친구들과 어울리다 풀을 베어오지 못하면 굶주리기도 하고 어느 때는 소가 일에 지쳐 쓰러져 있으면 아버지는 뱀을 잡아다 토막을 쳐 풀에 싸 강제로 먹이기도 한 소였다. 그럴 때면 나는 소고삐를 잡아줘야 하는데 제대로 잡지 못한다고 아버지에게 꾸중을 듣곤 했다. 이 소가 바로 새벽 4시만 되면 나를 일어나게 만든 소였다. 이른 새벽에 여물을 먹고 우마차를 끌고 나가는데 어느 날은 소가 지쳐 고개를 올라오다가 힘에 부쳐 도로에 주저앉아 있다가 힘이 회복되면 다시 일어나 오기도 하는 일이 있다고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주인이 회초리로 때리고 같이 옆에 붙어서 우마차를 끌어도 앉았을까? 생각하면 내 몸이 저절로 몸서리가 쳐진다. 그런 일이 있고 나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여물에 콩이나 호밀을 넣어서 쇠죽을 끓여 주기도 했다. 바로 영양보충을 해 준 것이다.

 

나는 요즘 나이를 먹으면서 걷기 운동을 하는데 무릎이 아플 때 아버지와 이 암소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면 아프다는 생각이 싹 사라졌다. 말이 백 리지 먹는 것도 시원찮은 데 하루도 아니고 이틀이 멀다고 우마차를 끌고 다녔던 아버지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말 못 하는 짐승인 소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하는 생각이 내 고통을 없애주는 모양이다.

 

이처럼 정이든 암소가 우리 집을 떠나게 된 것은 아버지의 욕심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우마차를 끄는 데 힘이 센 황소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이 소를 시장에 내다 팔고 다음에 들어온 소는 누런 황소로 눈망울이 부리부리한 아직 덜 큰 황소였다. 이 소는 어미 소가 되자 크기도 어마어마했으며 성질이 사나워 다루기 힘든 소로 변하였다. 아버지가 우마차를 끄는 데는 도움이 되었겠지만 다른 가족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성질이 얼마나 난폭했는지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노인이나 여자는 깔보고 눈을 부라리며 고개를 처박고 뿔을 흔들어 댄다. 소여물을 주는데도 고개를 처박고 흔들어 대어 눈치를 살피며 풀을 주고 여물을 줘야 했다. 소를 들판에 내다 맨다든지 집으로 끌어들이려면 소의 눈치를 살피며 줄을 길게 맨 채 멀리 떨어져 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도 어떤 때는 고개를 처박고 쫓아오기라도 하는 날은 기겁하고 도망치면 저 혼자 집으로 들어와 외양간으로 들어갔다. 이 소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집에서 오직 한 사람 아버지뿐이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나도 얼씬 못했다.

 

어느 날 새벽에 소를 잘못 묶어 놨나 소가 외양간에서 나와 집을 헤집고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인삼밭을 지키기 위하여 집에서 주무시지 않고 집에는 어머니와 우리뿐이었다. 어머니와 내가 방에서 나와 소를 외양간으로 몰아넣으려 하자 오히려 고개를 처박고 심술을 부리며 다가와 하는 수 없이 싸리문을 열고 몰래 아버지를 모셔온 적이 있었다. 이때 집을 앞뒤로 휘젓고 다니던 소가 담장 너머에서 아버지 기침 소리가 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외양간으로 들어가 다소곳이 있다. 이런 소를 보고 아버지는

 

소만 순한데 왼 소란 여.” 하셨다. 그러면 어머니는 불맨 소리로

그놈의 소 당신 기침 소리도 기가 막히게 아네.” 하며 볼멘소리를 했다.

 

결국, 이 소는 큰일을 저지를 뻔하고 우리 집을 떠났다. 어느 여름날 오후 60대인 외할아버지가 집에 오신 적이 있었다. 나와 동생은 소를 몰고 들어 왔는데 겁을 먹은 동생과 나는 멀리 떨어져 소를 따라서 왔다. 그런데 소가 집으로 와서 외양간으로 가지 않고 방문 앞에 서서 계시는 외할아버지를 향하여 고개를 처박고 달려 들은 것이다.

할아버지는 엉겁결에 소에 밀려 벽으로 몰렸다. 동생과 나는 할아버지에게서 떨어지라고 소 뒤에서 소리치며 지게 작대기로 때려대니 소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더 식식대며 밀어붙였다. 이때 할아버지는 소뿔을 양손으로 잡은 채 뒤로 밀려 벽에 등을 기대고 쓰러지면서

만복아, 소를 때리지 말고 이리와 고삐를 쳐들어라고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 할아버지하면서 할아버지 말씀대로 나는 문지방에 올라가 소고삐를 위로 쳐드니 소는 힘을 쓰지 못하고 할아버지에게서 떨어진 것이다. 그때서야 소라는 동물은 고삐를 잡고 머리를 들어 올리면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소고삐를 위로 쳐든 체로 소를 외양간으로 끌고 가 붙잡아 매었다.

 

이 사건으로 안방의 벽이 한쪽 부셔 젖으며 외할아버지는 우악스러운 황소 뿔에 떠받칠 뻔했으나 나이는 드셨지만 원래 힘이 장사이신 분이라 가까스로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아버지도 힘센 황소에 대하여 미련을 버리시고 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러면서 힘이 드는 우마차 일도 그만두었다. 그리고 우리 집은 담배 농사를 주로 하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을 떠난 다음은 포도밭과 복숭아밭 등 과수를 재배하여 가정을 꾸려나가셨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된 꼴머슴은 고등학교 3학년이 다 되어서야 면한 것이다.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어린 동생을 돌보고 부모님의 일손을 도와주던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지 않았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농사일을 도와주고 겨울에는 나무를 해 나르던 나는 집안 일손 돕는 것을 거절한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정 일손을 돕는 것보다 공부하겠다고 책상에만 앉아 있자 일에 지쳐 있는 부모님들에게는 불효자가 되어 매일 꾸중을 듣게 되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부모님이 심하게 나무라면 며칠씩 친구 자취방에서 생활하는 반항아로 변해 갔다. 비록 부모님 말씀을 안 듣고 가정 일손을 돕지 않았지만, 그와 같은 고집을 피운 결과 농촌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대학까지 졸업하여 교육공무원이 될 수 있었다.

 

이처럼 어려서부터 가정의 농사일을 돕고 꼴머슴이 되었던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교사 시절 시골 학교에 근무할 때는 수업하다 학생들이 지루해하면 내가 어린 시절에 농촌에서 경험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그때 자랑거리가 내 뼘은 꼴머슴이라 오른손과 왼손이 짝 뼘이라며 칠판에다 길이를 재어 주면서 풀을 베다 뱀을 만나 놀란 이야기나 할아버지를 위험에 빠트렸던 황소 이야기를 들려주면 학생들이 재미있어하며 분위기가 숙연해져 다시 수업을 이끌어 가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학부모회의 때 부모님들이 키도 크고 얼굴도 핸섬한 나를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일이라는 것은 전혀 모르고 고생 한 번 하지 않고 자란 사람으로 인식할 때 내 뼘의 길이를 재주며 꼴머슴 이야기를 들여 주곤 했다.

이처럼 어렸을 때 가정 일손은 도와주면서 얻은 것은 강한 인내력이었다. 무엇을 한다고 생각하면 아무리 힘들어도 참고 버티는 참을성이 길러진 것이다. 그리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고치려는 의식이 생겨났으며 남들이 갖지 못한 강한 집념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참 친구들과 재미있게 돌아다니며 놀아야 할 때 집안일을 하다 보니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발산하지 못하고 살아온 불행한 사람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친구들과 어울려 노래를 들어 보지도 못했고 불러보지 못했으니 노래라고는 한마디도 부르지 못했으며 운동도 잘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대학교 시절이나 직장 생활을 할 때 모임 자리에서 노래를 부르지 못해 쩔쩔매기도 했다. 특히 친구 결혼식 자리나 부모님 회갑연 또는 직원 연찬회 때 참석한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노래를 부르는 자리에서 얼굴만 붉히며 사양하다 마지못해 한마디 부르면 음치라는 놀림이나 받으며 살아야 했다.

그뿐 아니라 운동도 못 하는 몸치인 줄 알았다. 해본 적도 없고 구경도 제대로 못 했으니 잘할 리가 없었다. 남자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축구공도 마음 놓고 차본 적이 없었으며 배구공도 제대로 만져보지 못했으니 직장에서 직원체육이라도 하는 날이면 맨 날 뒤에서 손뼉이나 쳐야만 했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 사회적으로 자그마한 지위에 오르자 노래도 불러볼 기회가 나타나고 운동도 할 기회가 생겨났다. 나는 평생 음치인 줄 알았고 몸은 둔치라 운동을 못 하는 줄 알았는데 살다 보니 이제는 노래를 썩 잘하지는 못하지만 그럴듯하게 흉내는 내고 있으며 운동도 곧잘 하는 몸치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때는 낫자루와 괭이자루를 잡으면 성을 바꾼다며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공부하겠다고 부모님 속을 썩이며 왜 나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나?’ 원망도 많이 했는데 살다 보니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이처럼 자랑스러울 줄 알지 못했다.

어려서 지지리도 가난하고 부모님들 일손 돕는 것이 죽기보다 싫을 때도 있었는데 나이 먹어 직장에서 정년퇴직하고 나니 농부의 아들로 자란 것보다 더 큰 유산이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제는 내가 세상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이 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1950년대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전쟁의 후유증도 있었겠지만 발전하지 못한 우리나라 농촌의 생활은 너나 할 것 없이 비참했다. 1950년대 우리나라 국민 1인당 GNP가 약 80불에 불과했으니 얼마나 비참한 생활을 했는지 알 수 있다. 하긴 2만 불 시대에 사는 요즘 사람들이 생각할 때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던 것이 내 어린 시절이 아니던가?

 

이런 어려운 시절 열심히 일하시는 부모님을 도와 초등학교 2~3학년 때부터 집안 일손을 거들어 주고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꼴머슴과 나무지게를 진 것이다. 동생을 등에 업고 젖을 먹이기 위하여 남의 집 일을 하러 가신 어머니를 찾아 이 골짝 저 골짝 논밭으로 찾아다니는 것은 늘 있던 일이고 초등학교 6학년 때 농번기 어느 날인가는 동생을 데리고 학교에 가서 하루를 생활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흉년으로 학교를 더 다니지 못하고 집에서 농사일하는 농부로 전락한 일도 있었다. 내 머릿속에는 1962년으로 기억된다. 5·16이 일어난 그다음 해로 가뭄이 유독 심하여 농촌학교에서는 학교에 가서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전교생이 대민지원 일손 돕기를 했었다. 7월 초까지 모내기를 하지 못한 논에 밭작물이라도 재배할 수 있도록 흙덩이를 부숴 주러 다닌 것이다.

 

그해 우리 집은 가뭄과 벼 도열병으로 농사를 망쳐 고작 싸라기 쌀 5말을 생산했다. 이런 혹독한 흉년으로 나는 학교를 그만두었고 집에서 일하는 농부로 변신한 것이다. 그해 우리 가족의 식량은 어머니가 산에서 주어온 도토리를 물에다 며칠씩 우려내어 고구마와 같이 밥을 해 먹으며 겨울을 넘겨야 했었다. 그때 내가 해본 일은 농촌에서 하는 일은 거의 다 해 봤다. 모내기나 논에 김매기는 당연하고 곡식의 씨앗을 드린다든지 밭매기는 물론 봄에는 보리와 밀 타작 가을이면 벼 타작이나 콩 타작도 해 봤다.

어느 날은 이웃집에 벼 베기 품앗이도 해 봤다. 벼 타작을 하다 보면 어려서 그런지 손바닥 가죽이 연한 내 손이 볏단에 달아 피가 곧 날 것 같이 붉은색을 띠고 말랑말랑할 정도까지 일해 본 것이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벼 단을 논에서 집으로 지어 나르는데 30단씩 짊어지고 오전에 여섯 짐, 오후에 여섯 짐을 나르며 한 짐을 나른 다음 배가 고파 떫은 땡감이나 무를 뽑아 씹어 먹으면서 다니던 생각이 아련히 떠오른다.

내가 한 일 중에서 가장 싫어했던 일은 6월에 수확하는 보리타작이었다. 우리 집에서 생산하는 보리는 겉보리로 이삭 끝에 바늘 모양의 부푸러기가 있는데 이것이 6월 더위에 땀으로 뒤범벅이 된 옷에 들어가면 말할 수 없이 군시러웠다. 이 보리부푸러기는 보리 단을 지어 나를 때나 타작할 때 몸에 잘 달라붙었다. 그리고 내 키보다 더 큰 담배밭에서 담뱃순 집기와 벌레 잡기를 할 때 커다란 담뱃잎에서 끈적끈적한 진이 옷에 묻는 것이 그리도 싫었다.

 

그러나 내가 배우지 못한 농사일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밭을 가는 쟁기질이다. 쟁기질은 딱 한 번 해 봤는데 단 1m도 갈기 전 아버지는 내 손에서 쟁기를 빼앗아 가셨다. 이유는 쟁기질이 서툴러서 그런 모양인지 아니면 큰아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지 않으신 것인지는 모르지만 요령을 가르쳐 주시지 않고 못 하게 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쟁기로 밭을 갈 때 내 생각은 땅을 깊게 갈기 위하여 쟁기를 누르면서 가는 것으로 알았는데 실제는 반대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쟁기를 누르면 쟁기 날이 땅속으로 기어들어 가게 만들어져 있어 소가 끌고 갈 수가 없어 밭을 갈 수 없다. 즉 쟁기를 살며시 든다는 기분으로 밭을 갈아야 소가 쟁기를 끌고 갈 수 있는데 반대로 한 모양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나 그 후로 쟁기질을 할 기회가 오지 않아 확실한 것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일 중에서 가장 어렵다는 장군은 잘 지어 날랐다. 내가 짊어진 장군은 똥 장군이 아니다. 똥 장군은 아버지가 지셨고 가뭄에 인삼밭이나 곡식에 물을 주기 위하여 물장군을 지어 나른 것이다. 지게질은 꼴머슴에다 학교에서 제적당하고 2년 동안 여름에는 풀 짐을 지고 겨울 동안은 나무를 해 날랐으니 선수가 된 것이다. 나무 짐이나 풀 짐은 아무렇게나 해서 짊어지면 힘들어서 갈 수가 없다. 나뭇짐은 보기 좋으면서도 중력이 한 군데로 몰리지 않게 짐을 꾸려야 짊어지기가 편하며 풀도 지게에 붙어있는 발채에 쌓아 올릴 때 요령이 있어야 많이 올릴 수 있다. 그리고 장군은 리듬을 맞춰야 출렁이지 않고 걸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일을 하던 나는 책을 좋아하여 힘들고 바쁜 일손에서도 친구들이나 헌책방에서 책을 구해다 읽고 있었다. 그 영향인지 어느 날부터 학교에 다시 가겠다는 생각으로 부모님을 졸라 2년 동안 일하고 다시 고등학교를 들어가 시골 마을에서는 구경하기 어려운 대학 생활도 하게 된 것이다. 그때 내 결심은 '내가 괭이나 낮을 잡으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단단히 결심하고 공부를 시작했었다. 그러다 보니 농사짓고 사는 우리 집이 창피하게 느꼈던 것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랬던 내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것을 이렇게 자랑스럽게 느끼게 된 것은 나이가 70이 다 되어서야 깨달았다. 그동안 공직생활을 하면서 남에게 욕먹지 않는 삶을 살겠다고 발버둥 치며 살다 정년이 되어 집에 있게 되자 또 다른 사회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많은 선배로부터 퇴직 후의 생활을 들어 왔고, 퇴직 전 퇴직 후 생활을 위하여 나라에서 시행하는 교육도 받아 보았지만 손수 체험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었다.

 

누구나 직장에서 퇴직하고 나면 시원하면서도 섭섭함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시원함은 공직에서 맡고 있던 책임감에서 벗어났다는 기분일 것이고 섭섭함은 그동안 누려왔던 권한을 내려놓는 것에서 오는 허탈감이 아니겠는가?

퇴직 후 처음 몇 달은 식구로부터 특별대우를 받았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가? 이제는 다리 쭉 펴고 편안하게 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살이 그리 만만하던가? 얼마 가지 못해 갈등은 또 쌓이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서로 다른 생활을 해 왔던 부부가 아니던가. 맞벌이 부부는 아침만 먹으면 서로 다른 직장에 나가 하는 일이 다르고 만나는 사람이 달랐으며 직장의 분위기도 다른 곳에서 자기 나름대로 적응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퇴직하고 집에 들어앉자 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부부간의 간섭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부인이 가정에 있던 사람은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집안은 자기 세상이었는데 남편이 출근하지 않고 집에 있으니 자기만의 공간이 줄어든 것이다. 즉 새로운 세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고 사사건건 서로 잔소리한다고 부닥치게 된다.

그렇다고 부닥치기 싫어 밖에 나가보니 생소하기만 하다. 같은 생활을 했던 옛 직장 동료들을 만나는 것도 한두 번이지 맨 날 만나서 할 이야깃거리도 없다. 그래서 각자 자기 나름대로 취미 생활을 한다면서 자기의 재능을 찾기도 한다. 사회적 직위가 높았던 사람은 처음에는 이곳저곳에 초청받아 강의를 나간다며 목에 힘을 주기도 하지만 그도 얼마 못 가 다 물러나게 되어있다.

 

또 평생교육으로 서예를 배운다든지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악기를 배워 봉사활동을 다니기도 하는데, 이것도 한계가 있다. 서예나 그림은 매일 쓰고 그리는 것을 처치하기도 곤란하고 악기를 배우는 것도 그리 만만하지가 않다사람에 따라서는 운동으로 눈을 돌려 테니스나 배드민턴 또는 탁구 등을 하는데 몸이 사방에서 무리라고 신호를 보내니 얼마 못 가서 그만두어야 하고, 돈 좀 있는 사람들은 맑은 공기를 마시며 즐긴다며 골프를 하는데 이도 쉽지만은 않다.

 

퇴직하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제일 부러운 직업이 자영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조그마한 사업체를 가진 사람은 물론 힘은 들겠지만 늘 일을 할 수 있으니 노년의 새로운 사회에 특별히 준비할 필요성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젊어서는 알지 못했던 이런 현상이 어디서 나타났나 생각해 보니 과거 사회에서는 인생 70이며 거의 다 사라 젖는데 지금은 인간 수명이 늘어나 100세 인생이라고 떠들다 보니 30년이란 세월을 보내기 위한 새로운 고민거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고민거리를 해결하려는 방법으로 내가 선택한 것이 '밭 가꾸기'라는 취미 생활이다. 처음에는 밭 가꾸기를 하면서 골프에 취미를 붙였다. 오전에 밭에 가서 놀다 오후는 클럽에 나가 골프 연습을 하고 샤워를 하고 들어오는 것이 내 하루의 삶이었다.

그리고 매주 월요일은 전국 곳곳 골프장을 찾아다니며 필드에 나가 골프 라운딩을 즐겼다. 그리고 한여름이나 겨울에는 태국으로 골프 여행을 다녀 보기도 했다. 그때 기분은 85세까지는 충분히 골프를 즐길 줄 알았는데 막상 해보니 그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골프에는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단다.

첫째, 건강해야 한다. 18홀을 돌 수 있는 건강한 체력이 없으면 다른 조건을 다 갖추어져 있어도 골프는 할 수 없다.

둘째, 돈이 있어야 한다. 필드에 나갈 때마다 필드와 카터 사용료 및 캐디비가 만만치 않게 들어간다.

셋째, 친구가 있어야 한다. 골프는 네 사람이 하는 운동이다. 세 사람이 해도 되지만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 네 사람이 서로 믿고 라운딩을 하는 운동으로 서로 믿지 못하면 운동보다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고 네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약속을 잘 지키지 않으면 어려운 운동이다.

 

이런 골프를 근 5년 가까이 즐겨 보았다. 그러나 허리 건강도 좋지 않은 데다 여러 가지 조건이 맞지 않아 그만둔 지 3년 정도 되었다. 골프를 그만둘 때 처음에는 골프채가 아깝기도 했지만, 그 대신 걷기에 주력하다 보니 건강도 훨씬 좋아지고 스트레스도 덜 받는 노년 생활이 되었다. 대신 밭 가꾸기에 취미를 붙여 밭작물 재배에는 일가견을 갖게 된 것이다.

골프를 하다 그만두고 밭에서 일하자 만나는 친구마다

요즘 뭘 하길래 안 보여? 하면 나는 스스럼없이

매일 필드 가서 살아.”라고 답했다. 그러면

어느 필드에 다녀왔는데

내 전용 필드

어느 골프장 회원권을 가지고 있어한다. 그때야 나는

골프장이 아니라 내 농장에 가서 사는데하며 웃었다. 그러면서

밭이 필드(field) 아닌가?”

예이~~” 한다. 처음에는 이렇게 농담을 주고 밭으며 웃었으나 다음부터 만나면

또 밭에 가서 일하다 왔어.”

응 오늘은 고구마를 심었는데

얼마나?”

“60

“60단이면 몇 포기며 몇 평 정도야

“6,000포기로 한 600평 정도

완전히 일에 미쳐 있구먼. 힘 안 들어하며 신기한 듯 바라본다. 농사일을 모르는 친구들로서는 신기할 것이다. 하긴 힘이 왜 들지 않겠는가? 누가 시켜서 한다면 절대 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신기한 것은 사실이다. 퇴직하기 몇 달 전만 해도 비가 많이 와 밭에 가서 삽으로 물이 내려가라고 골을 파는데 삽질을 두 번이나 했나 갑자기 허리가 뜻 금하더니 제대로 움직일 수 없어 병원에 다니면서 물리치료를 두 달씩이나 받은 사람인데 이제는 매일 밭에 나가서 사니 이보다 신기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밭농사를 짓는데, 가장 힘이 들 때가 여름 장마철이 지나면 서다.. 여름 장마철이 지나면서 밭에 풀이 아침저녁으로 다르게 크기 때문에 이때 잠깐 시기를 놓치면 죽어라 재배한 농작물 밭이 풀밭으로 변한다.

 

농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은 대부분 직장에서 퇴직하면 조용히 농사나 지으면서 살겠다고 한 번씩은 달라붙어 본다. 그러나 대부분 2년을 넘기지 못하고 포기하고 만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많은 이유는 풀 때문에 못 하겠다는 것이다.

모든 식물은 처음 싹을 틔워 나올 때는 연노랑 색을 띤 보드라운 떡잎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다. 그러다 며칠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크는 것이 아침저녁으로 다르기 때문에 어렸을 때 김을 매주지 않고 시기를 놓치면 농부가 풀에 지고 마는 것이다.

 

하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