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소리(수필)

빈말(실언)

日陵 2025. 9. 22. 18:24

 

 

  낙엽을 밝으며 가을의 정취에 넋을 높고 걷다 보니 지난날들의 추억이 가을바람처럼 스쳐간다. 인생 70이 그리 짧은 세월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오며 아름답고 행복했던 추억보다는 고달팠던 추억들이 많았던 것 같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어린 시절 6. 25란 한국동란을 거치며 살아온 세대라 195~60년대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시절 가난에 유소년기 청년기를 보낸 추억들이 풍전등화같이 가물가물 스쳐간다. 

 

  내 어렸던 모습을 떠 올리며 요즘 아이들의 생활을 생각하니 믿어지지 않는 외계의 세상에서 살다 온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꾀죄죄하게 살아왔던가? 그런 세상에서 가난을 벗어나 보자고 발버등치면서 만들어 놓은 것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아닌가 하는 자부심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하며 걷다 보니 문득 '아니면 말고'라는 말이 떠오르며 입 언저리에 웃음이 스쳐간다. 아마 60년 대 말이나 70년대 초쯤으로 생각이 되는데 우리 사회에 '아니면 말고'라는 말이 하나의 유행어로 떠돌았다. 어느 친구가 말을 하면 열심히 듣고 있는데 끝에 가서 하는 말이 '아니면 말고' 할 때 그 기분은 무어라 말할 수 없이 기분을 나쁘게 했다. 친구에게 우롱당한 듯한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특히 남의 말을 잘 믿는 사람은 맨탈이 더 크게 느낄 수뿐이 없었다.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책을 좋아하여 많은 세계명작집과 위인전을 읽어 왔다. 가난한 환경에서 열심히 일을 하시는 부모님들의 바쁜 일 손으로 사랑은 크게 받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가난에서 벗어나 보자고 하는 욕망이 어려서부터 나타 낳는지 모른다. 그리고 거짓이 없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 보겠다는 꿈을 가슴에 품어 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어떤 약속이든 약속을 제일 중시하는 사람으로 살아왔다.

 

  약속을 중시해 오던 나는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약속을 세 번만 어기면 절대로 그를 친구로 인정하지 않는 습관이 나타 낳다. 이런 성격의 소유자는 살기가 어려웠던 시절인데도 고집스럽게도 나는 약속을 중하게 여겨 온 것이다.  해방 후 우리나라는 남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 사회였나 보다. 그리고 시간관념이 별로 없어 시간 약속을 하면 잘 지키지 않아 '코리안타임'아란 유행어가 만발하던 시절이었다. 어찌 보면 약속이란 의미를 모르고 살던 사회 풍조가 아니었는지 모른다.

 

  이런 사회에서 약속을 철칙같이 지켜 온 나는 하나의 바보였는지도 모른다. 이런 나는 친구들의 말을 찰떡같이 믿는데 실컨 이야기해 놓고 '아니면 말고'라니 맥이 빠질 수뿐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친했던 친구도 헛소리 몇 번 하면 자연스레 마음속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조금 나이가 먹어 가면서 술 좌석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사람들은 술을 마시면 너나 나나 대부분 큰소리를 치는 경우가 많다. 즉 약속을 잘한다. 그러고는 다음에 언제 내가 그랬냐는 듯 시침 이를 띠는 사람이 대다수다. 그러다 보니 술 마시고 한 이야기는 다 무효라는 유행어가 나오기도 했다. 

 

  내가 젊은 시절에는 사업을 잘하려면 첫 번째가 술을 잘 마셔야 한다고 한 때가 있었다. 그 이야기는 사람들이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져 평소 같으면 하지 않을 약속도 곧 잘하기 때문에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려면 술 좌석을 만든 것이다. 이때 상대보다 술이 강해야 상대를 설득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될 것 같다. 나는 이런 술 좌석에 한 약속도 꼭 지켜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술에 취해서 잘 모르겠는 데"하며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다 보면 그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서 신용이 없는 사람으로 인식되어 점점 도태되는 것이 이 사회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나도 술을 마시면 큰 소리를 처 놓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으로 변해 가고 있는 모양이란 생각이 든다. 

 

  내 나이 칠십이 지난 지 몇 년이 되었지만 성격의 변화는 별로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난번 어느 모임에 참석하여 기분이 좋았나 맥주에 소주에다 친구가 가져온 인삼주를 다른 사람들은 독하다고 피하는데 겁 없이 그라스로 몇 잔을 받아먹었으니 술이 세다고 하도 도가 넘었나 보다. 대리 운전으로 친구차를 타고 왔는데 차를 탈 때 기억만 있고 집에 와서 친구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려고 핸드폰을 찾으니 없었다. 친구차에 빠트린 것이라 생각하고 친구에게 연락을 하여 차에 빠진 핸드폰을 식구를 시켜 찾아오게 한 것은 기억이 나는데 같이 차를 타고 온 사람들이 언제 어디에서 내렸나 전혀 기억이 없었으며, 내가 언제 어디서 내렸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집에는 잘 와서 핸드폰을 찾은 것을 보면 꼭 거짓말 같다.

 

  그러고 얼마나 지난 후에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늘이 작년에 작고한 친구의 기일인데 공원묘지에 같이 가지 않겠냐는 전화였다. 나는 갑자기 받은 전화라 난감해하니 그는 지난번 차에서 내가 먼저 같이 가자고 했단다. 그런데 나는 전혀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실언이 되고 빈말이 되는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다 보니 이제는 나도 빈말이나 하는 늙은이로 변한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어 입맛이 쌉싸롭했다. 젊은 시절 유행했던 '아니면 말고'라는 말이 뇌리를 스쳐가며 이제는 술 좌석도 조심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깊어가는 가을 정취를 만끽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세월의 아쉬움이 서글퍼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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