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연이란 글을 쓰려고 하다 보니 내가 살아오면서 엮였던 사람들이 너무 많아 정리가 잘 안 된다. 그래서 주제를 바꾸어 친구라는 개념으로 구분하여 글을 써 보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친구 중에서는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죽마고우인 것 같아 내 마음속에 있는 죽마고우는 어떤 사람들인가 정리해 보았다.
죽마고우란 ‘대나무로 만든 말을 타고 놀던 벗이라는 뜻으로, 어릴 때부터 같이 놀며 자란 친한 벗을 이르는 말’이라고 사전에는 설명하고 있다. 나는 손곱장난하며 놀던 친구들은 기억이 없다. 내가 8살 때 태어난 곳을 떠나 금산이란 곳으로 이사를 와서 살았기 때문에 손꼽 장난하며 논던 친구들은 기역에서 사라진 모양이다. 굳이 찾아보자면 이웃에 살던 한 살 위인 8촌 형이 상당이 오랫동안 기억에 있었는데 8살 때 헤어진 후 만나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 2학년 말에 금산이란 곳으로 이사를 와서 앞집과 뒷집에 같은 나이인 친구들이 살았다. 앞집 친구는 나보다 생일이 빠르며 등치가 컸으며 뒷집 친구는 바싹 마른 체구에 키가 컸다. 이들은 모두 형과 누나들이 몇 사람씩 있는 젖 띠기로 형들이 고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으며 가정환경이 나보다 좋았다. 그러다 보니 그들과 딱지치기를 하려면 나는 종이가 없어 책을 찢어 딱지치기하다 부모에게 혼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구슬치기도 유리구슬을 구할 수 없어 도데 흙이라고 하는 것으로 만들어 구슬치기 하자고 하면 그들이 시켜주지 않던 기억들이 남아 있다. 그러나 타관에서 이사 온 나는 처음에는 내 주변 아이들에게 지고 살았지만 한 사람 씩 싸움을 하여 이겨 나가 대장 노릇을 했던 추억이 있다.
이처럼 친하게 놀던 친구들은 둘 다 나보다 한 학년 아래인데 중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져 앞집 ‘현’이는 보결생으로 1학년을 다니다 그마저도 낙제하여 그만두었고 뒷집 ‘엽’이는 입학시험에 떨어지자 처음부터 중학교를 다니지 안했다. 그리고 내가 중학교를 들어가면서 같은 마을이지만 전에 살던 집보다 조금 더 좋은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그들과 전과 같이 어울리는 것은 줄어들었으나 쾌 오랫동안 다정하게 지내던 친구들이었다.
그 후 뒷집 ‘엽’이는 집에서 부모님 일손을 거들어 주다 18살이 되자 군 부사관에 들어가 월남 전투에 맹호부대로 참전하여 3년을 복무하고 돌아와 일찍 결혼도 하고 상사까지 진급하여 잘 산다고 들었는데 어느 날 고향에 가 보니 들리는 소리가 죽었다고 한다. 혹시 월남전에서 고엽제에 걸려서 그런 지 않았나 생각해 보지만, 알 수가 없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대학 시절 고향에 갔는데 그가 마침 휴가를 와서 막걸리 몇 잔 마신 기억이 마지막 같다. 그와의 추억은 고등학교 시절 어느 여름날 저녁에 마을 앞 강변에서 노는데 그는 군대에 갔던 형이 가지고 왔다고 대검을 가지고 나와 놀다 내가 그의 허벅지에 상처를 낸 적이 있는데 그의 어머니가 우리 집에 와서
“복희가 우리 ‘엽’ 이를 죽이려고 대검으로 찔렀다”라고” 어머니를 윽박질러 어머니로부터 단단히 혼난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대학 시절 그가 대천 앞바다에서 방첩대에 근무하며 초대해 줘서 내 생전 처음 바다의 배에서 잠을 자고 지역 주민이 잡았다고 바다 범 고기를 가져다줘 얻어먹은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다. 참으로 순순한 친구였는데 인연이 거기까지였나 보다.
그리고 앞집 ‘현’이는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다 그만두고 집안일을 도울 때 쾌나 가까이 지내며 인생을 논하고 했는데 그는 고향을 뛰쳐나가 서울 동대문 옆에 있던 전파사를 다녔고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기 위하여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서 공부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우리 두 사람은 자주 만나 가난한 젊은이들의 서러움을 더러 논하곤 했는데 아마 1968년 1월로 기억된다. 내가 대학 원서를 쓰기 위하여 금산을 다녀올 일이 있어 금산을 간다 하니 부탁을 한다. 올라오는 길에 자기 집에 들여 자기 작은 형 외투를 가져다 달라는 것이다. 나는 그의 집에 들러 외투를 가지고 오는데 고등학교 동창생도 같은 부탁을 하여 외투 두 개를 가방에 넣고 내가 밥을 얻어먹고 있던 이모님이 5살 먹은 자기 아들이 할아버지 댁에 있으니 데리고 와 달라는 부탁이 있어 이종사촌 동생을 데리고 대전역 시외버스 정류장에 왔는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차표를 끊어 동생을 버스에 태우고 잠깐 화장실을 다녀오는 사이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화장실을 들어가는데 입구에서 야바위꾼들이 컵 세 개에다 주사위를 감춰 놓고 어느 컵에 들어 있나 맞추면 시계를 주는 야바위 놀이를 하고 있는데 내가 거기에 말려든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나가다 보니 컵 속에다 주사위를 숨기는 것은 본 것이다. 나는
“이것이요.” 했더니 돈을 걸란다. 3,000원을 걸어서 맞추면 시계를 준단다. 그때 마침 시계가 없을 때라 갑자기 촌놈이 시계 욕심이 나 호주머니를 뒤져 보니 1,500원뿐이 없었다. 그래서 돈이 모자란다고 하니 다른 물건을 걸으란다. 나는 시계 욕심에 눈이 멀어 자동차에 있는 친구들 외투 두벌을 가져다주고 내기를 한 것이다. 얼마나 얼이 석은 짓인가? 야바위꾼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같은 한 패거리라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있었으며 혹시 내가 생각하고 있는 컵 속에 주사위가 들었다고 치더라도 주변 사람들을 믿고 그대로 놔두고 자동차에 갔다 왔으니 바보 노릇을 해도 상 바보 노릇을 한 것이다. 그래서 돈 1,500원과 외투 두 개를 순간 날려 버렸다. 내가 뻥 한 사이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돈을 잃은 나는 서울 갈 차비를 날려 천안까지 끈은 버스표를 되물어 기차를 타고 영등포에 와서 어느 아가씨에게 시내버스표 한 장을 구걸하여 서대문구에 있는 연희동 이모 내 집을 간 적이 있었다.
사건이 나타난 다음 날 나는 친구들에게 미안하다며 대학 시험이 끝나면 외투 건을 해결할 테니 며칠만 참아달라고 부탁을 하고 공부를 하고 있는데 시험 보기 이틀 전에 금산에서 나보다 아래인 이모가 자기 언니 내 집에 와서 나보고 외투를 어떻게 했냐고 따지며 집에서 난리가 낫단다. 어느 친구가 집으로 내가 외투를 잃어버렸으니 돈 15,000원을 당장 붙여달라고 편지를 했단다.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내가 잘못해서 그리 되었으니 할 말은 없다만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분명 고등학교 동창생이 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한 사람은 가장 믿는 죽마고우니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뒤에 알고 보니 죽마고우라고 믿었던 초등학교뿐이 아니 나온 친구의 짓이었다. 그 뒤 대전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야바위꾼들을 만나 나머지 돈 1,500원을 주고 외투 두 개를 찾아다 준 다음 나는 이 친구와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았다. 이 친구는 고향에서 같이 있을 때 자기 작은 형이 군대에서 휴가를 나오자 자기 형이 부대에 들어갈 때 인삼을 사가니까 자기가 자기네 인삼을 캐서 형에게 주고 돈을 받을 테니까 나보고 망을 보라며 인삼밭에 들어가 인삼을 캐다 형에게 준 적이 있었다. 그때 형이 인삼을 어데서 가져왔냐고 따지자 나와 같이 자기네 것을 캤다고 일러바쳐 나는 본의 아니게 인삼 도둑이 되어 동내 청년회장에게 주의를 들었을 때 이 친구를 알아봤어야 했는데 마음씨 착하고 순진한 나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러다 30년 가까이 세월이 흘러 내가 천안에서 교사 생활을 할 때 어떻게 알고 연락을 했는지 그로부터 전화가 왔다. 천안 어느 아파트 현장에서 일을 하는데 한번 만나자는 것이다. 그가 일하고 있는 아파트 현장이 우리 집에서 불과 500m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나는 외투 사건이 너무 마음속 깊이 박혀 그를 만나 주지 않았다. 그때 혈기 왕성한 십 대 후반 나이로 오해를 한 고등학교 동기생을 죽여버리겠다고 독기를 품게 한 사건이 아니었는가 생각하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친구도 멀어지게 된 것이다.
굳이 죽마고우를 찾으라면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같은 반에서 다닌 친구가 한 사람 있다. 그는 나보다 나이는 한 살 위였으나 마음씨가 너무 고와 영원히 잊지 못할 친구다. 그러나 그와의 인연도 중학교를 졸업하고 헤어져야 했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않았다. 그리고 인삼을 재배한다고 운장산 자락에 있는 명도 봉이라고 하는 깊고 깊은 산속인 진안군 주천면 대불리라고 하는 곳에서 인삼을 재배한다고 10대 후반의 어린 나이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가 있는 곳을 한 번 찾아갔으나 그 후로는 만나지 못했다. 소문에 의하면 거기서 인삼 재배로 쾌 돈을 벌었으며 그 후 다시 경상북도 상주로 가서 인삼재배를 한다고 하더니 어느 날인가 소문이 죽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나에게는 죽마고우라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현재 없다는 결론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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