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소리(수필)

친구 2. 고등학교 친구

日陵 2025. 9. 22. 07:11

 

    우리가 살아가면서 죽마고우는 아니지만, 죽마고우 같이 잊을 수 없는 친구들이 있다. 그들이 바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친구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친구들을 엄밀히 구분하면 그 나름대로 차이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 중학교 친구들은 죽마고우에 가까운 그저 놀이에 집착했던 친구라면 고등학교 친구는 나름대로 자기 인생의 꿈을 생각하면서 만난 친구들이라 깊이가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내 머릿속에 남은 고등학교 친구들의 이름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지만, 마음에 정을 준 친구는 그저 몇 손가락으로 집을 정도인 것 같다.

 

나는 다른 사람과 달리 고등학교 1학년을 두 번 다녔다. 중학교 3학년 때 군사혁명이 나타나 내가 다닌 고등학교가 전라북도 금산군(그 후 충청남도로 바뀜)이라 내 동기들은 대전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을 할 수가 없었다. 바로 군사혁명정부에서 졸업할 중학교가 속한 도로만 진학할 수 있고 그 도에 없는 특수 고등학교만 타도로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중학교에서 공부를 잘했던 친구들은 인근에 있는 대전고등학교로 진학하지 못하고 멀리 떨어진 전주고등학교로 진학하였으며 타도로 진학한 학생은 전라북도에 없는 철도 고등학교로 진학한 한 학생뿐이었다.

 

나는 가정 형편도 어려웠지만, 대전에 있는 공업 고등학교를 진학하고 싶었는데 원서도 낼 수 없어 내가 다닌 중학교와 병설인 금산농업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 다닐 마음이 별로 없어 입학시험을 보는 날도 지각하여 1교시는 문제도 다 읽어보지 못하고 시험을 끝냈는데 수험생들 실력이 형편없었는지 아니면 내가 실력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중상위권으로 입학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고등학교가 재미있을 수가 없다. 늘 머릿속에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강의록으로 공부하여 검정고시를 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내가 속한 1학년 2반에 리틀 서클을 만들었다. 키순으로 되어있는 학급 번호에 1, 4, 6, 7, 10번으로 5명이 장단이 맞아 어울려서 뒤 번에 있는 큰 학생들을 괴롭혔다. 1번 학생이 커다란 30~40번 학생을 놀리면 자연히 싸움이 붙게 되는데 그때 우리는 말이는 척하면서 큰아이를 붙잡아 주면 작은 학생은 마음 놓고 때리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뒷번호 학생들도 우리를 함부로 하지 못했다.  리틀 서클 친구 중에 초등학교 때부터 같은 반이었던 4번 학생이 싸움을 잘하고 야무진 동식이란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오랫동안 기억되며 만나보고 싶은 사람인 것이다. 이 친구는 고등학교 친구라기보다는 죽마고우 같은 생각을 같게하는 하는 친구인 것이다.

 

그러다 10월경에 나는 학교를 그만두었다. 1962년으로 기역 된다. 그 해 무척이나 가뭄이 심하여 학교에 가면 공부는 하지 않고 매일 모내기를 하지 못한 논에 흙덩이를 부숴 밭농사라도 하도록 일손 돕기를 다닌 해인데 우리 집도 가뭄과 벼 도열병이란 재해를 피해 가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 낼 수업료가 없어 수업료 미납으로 10월에 제적을 당한 것이다. 그 후 나는 1년 반 동안 집에서 부모님 일손을 도와주다 깨달은 것이 있었다. 공부를 잘하던 못하던, 학교가 좋던 나쁘던 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부모님에게 사정하여 복학했는데 내 친구들은 3학년에 다니고 있는데 나는 2학년으로 가라는 것을 고집을 부려 1학년으로 들어갔다.

 

이때 만난 친구 중에 오래 동안 기역 되는 친구가 한사람 있다. 그의 나이는 나보다 한 살 위였으나 중학교는 1년 후배로 늦게 학교를 들어온 친구다. 그러다 보니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 늘 반장에 공부도 학급에서 1~2등을 했던 모양이다. 그의 집은 금산군 제원면에서도 큰 고개를 넘어가는 시골에서 살았으나 가정은 시골 형편으로서는 부자였으며 위로 형님이 두 분 계시고 밑으로는 여동생이 하나 있는 가정인데 이 친구만 중학교에 다닌 것이다. 그런데 중학교에서 1~2등을 하니 부모님이나 형들이 좋아서 이 친구에게 기대가 커 고등학교를 대전고등학교로 진학시키려 했는데 입학시험에 떨어져 1년 쉬고 들어 온 것이 나와 인연이 된 것이다.

 

그와 나는 쾌나 가까이 지냈다. 그는 혼자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나는 툭하면 그의 방에서 같이 생활했다. 그는 삼 년 동안 학급 반장을 했으며 그가 학생회장에 입후보했을 때 내가 총책임자로 선거운동을 했지만 아쉽게도 한 표차로 떨어진 추억도 있다. 그리고 그는 나보다 성적이 늘 높아 학급에서 2~3등을 했고 나는 3~4등을 했다. 그와 나는 3년간 같은 반이었는데 시험을 볼 때면 그는 나에게 보여 주기를 원했으나 부정을 싫어하는 나는 절대로 보여주지 않았다. 학급에서 1~2등 하는 아이들은 시험 볼 때 서로 눈치껏 보여 주는데 우리는 내가 고집을 부리는 통에 그 친구들에게 늘 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친구는 말 수단이 좋고 운동도 잘하며 얼굴도 잘생겨 고등학교 시절부터 연애에도 일가견이 있던 친구로 가장 친하게 지냈지만 순수한 촌놈인 나는 그의 행동에 대하여 늘 불만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는 곳 바로 대학입학시험을 보았으나 실패하였고 그다음 해 다시 도전했으나 또 실패하여 결국 대학을 진학하지 못하고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다. 나는 졸업 당시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입학시험을 보지 못하고 졸업 후에 손수 돈을 벌어 대학진학 준비를 했다. 그가 대학을 가지 못한 것은 너무 멋에 치중하여 아가씨들에게 눈독을 들인 것이 독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군에 있을 때 나는 대학을 진학하고 바로 군에 입대하여 근 5년간 서로 만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대학에서 새로운 친구가 나타났고 학교생활이 바쁘다 보니 자연적 그와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와 헤어지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다른 데 있었다. 내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대학교 3학년 초에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는데 학교 친구들과 인척들을 다 놔두고 그에게 접수를 맡겼다. 내 생각은 가장 가까운 친구라는 생각에서 맡겼는데 이것이 문제가 된 모양이다.

 

결혼식 후 여행을 다녀와 학교에 나가니 교수들과 가까이 지내는 친구가 나보고 교수들에게 특별히 인사를 하란다. 이유는 교수님 몇 분이 축의금을 주셔서 자기가 접수했단다. 그러나 내가 확인한 접수부에는 교수님들 축의금은 기록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친구를 의심하기도 싫어 잊어버리기로 했는데 그는 미안했던지 그후 소식을 끊고 말았다. 

 

소문에 의하면 결혼 후 1980년대 잘 나가던 영부인과 같은 종씨로 대전에서 슈퍼마켓을 크게 운영하고 있다고 하는데 나도 대학 졸업 후 직장이 강원도 속초에 있다 보니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결국 나는 그를 결혼식에 초대한 것이 친구를 잃은 격이 된 것이다.

 

그는 나에게 자기 동생을 줄 테니 매제가 되어 달라던 친구였는데 내 머릿속에 그를 쉽게 잃을 수가 있겠는가. 죽기 전에 한 번쯤은 만나야 할 친구인데 얼굴이나 알아볼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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