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물속에 갇혀버린 신세
물속에서 피해를 줄여 보려고 얼마나 분주하게 움직였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도움이 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았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구조대가 빨리 나타나 우리를 구출해 줄 때까지 언니와 딸을 안심시켜 무사하게 보살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려면 우리가 물을 피할 수 있는 곳이 더 높으면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넓고 안전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구조대가 올 때까지 불어나는 물을 피하고자 우리가 만든 것은 주방 싱크대 앞에다 식탁을 붙인 다음 그 앞에 언니와 같이 옷장을 가져다 엎어놓고 선미가 쓰는 책상과 내가 사용하는 화장대 등 집에 있는 튼튼한 가구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그 위에다 이불과 옷 보따리를 올려놔 평평하게 균형을 맞추었다.
가능한 조금이라도 안전하면서도 높게 만들었다.
평소 같으면 내 말을 잘 듣지 않는 언니였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내가 시키는 대로 말을 잘 들어줬다..
이렇게 거실과 방으로 돌아다니는데 물에 떠 있는 바가지나 플라스틱 그릇과 비닐봉지 등 가벼운 물건들이 걸리적거리기도 하였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운반하여 싸놓고 우리 세 사람은 그 위로 올라가 쭈그리고 앉아 물을 피하면서 구조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언니와 선미는 무서운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공포에 질린 눈으로 몸을 움츠린 채 나만 바라보고 있다.
나는 언니의 손과 선미의 손을 꼭 잡으며 빨리 구조대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저녁 9시 30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사람이란 참 신기한 동물인 모양이다.
이제는 내가 더 할 일이 없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멍해지며 핸드폰의 희미한 불빛을 따라 창문 삼분의 이 가까이 넘실거리는 흙탕물이 꼭 바닷속에 빠져 있는 난파선에 타고 있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내가 미처 가는지 창밖으로 넘실거리는 흙탕물 모습이 빙하 속에 갇혀버린 타이타닉 배가 떠올랐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와 같이 감명 깊게 보았던 ‘타이타닉’이란 영화가 떠 오른 것이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상의 총 14개 부문 중 11개 부문에서 수상을 거머쥔 명화 중의 명화로 제작비만 약 2억 달러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했다.
그 당시까지 가장 비싸게 만든 영화일뿐더러 흥행에 성공하여 영화사상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이기도 했다는 소문이 나 있었다.
이 영화를 내가 오랫동안 기억하게 된 동기는
뱃머리에서 남자 주인공인 잭과 여자 주인공인 로즈가 두 팔을 벌린 채 키스하는 장면을 잊을 수가 없었다.
아마 감수성이 예민했던 여고생으로 나도 그런 사랑을 해보고 싶다는 부러움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또한 장면은 잭이 목걸이만 목에 건 로즈의 나신을 그리는 장면을 보면서 저런 멋진 남자를 만난다면 나도 로즈와 같은 저런 모습의 포즈를 취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로즈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하는 10대 여자아이들의 허황한 상상의 꿈에서 부러워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이 영화를 관람한 지 20년이란 세월이 흘러갔지만 남자 주인공인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와 여자 주인공 ‘케이트 윈즐릿’의 이름을 지금까지 기억하는 것은 그들의 아름다웠던 모습이 내 어린 가슴에 너무 깊은 감흥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이 영화가 다른 영화보다 더 오래 기억하는 것은 영화의 아름다운 장면과 나와 같은 가난한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호화로운 유람선 여행을 즐기는 상류층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부러움이 나의 욕망을 자극한 것이 아니었겠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내가 이 영화를 더 오랫동안 기역하고 있는 것은 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이 영화를 보고 오던 날 영화가 너무 길어 집에 늦게 들어왔다고 어머니로부터 여자아이가 밤늦게 다닌다고 얼마나 단단히 혼났나 그다음부터는 영화도 잘 보지 않았지만, 어지간한 일로는 밤에 돌아다니지 않는 사람으로 변한 계기가 되었다.
깜깜한 어둠에 갇혀 희미한 빛 속에 넋을 두고 있으니 얼마나 적막했는지 벽에 걸린 벽시계의
찰칵!
찰칵! 거리는 시곗바늘 돌아가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귀에 울려왔다.
나는 핸드폰 손전등으로 시계를 비춰보니 시계의 유리판에 ‘수산협동조합장 기경수’라는 글자가 눈에 띄었다.
정신이 나간 채 멍하니 시계를 쳐다보고 있자니 갑자기 아버지 생각이 스쳐 갔다.
원래 우리 집은 시흥에 있는 조그만 어촌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3형제의 막내아들로 시골에서 중학교만 나와 일찍부터 할아버지와 같이 고기잡이배를 탔으며 술은 좋아했고 늘 싱글벙글 웃고 다녀 마을에서 마음씨 좋은 청년이라고 소문이 나 있었단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조그만 어선을 한 척 가지고 있었단다.
그러다 보니 부자는 아니었지만, 시골에서는 가족이 굶주리지 않을 만큼은 살고 있었던 모양이다.
시골에서 먹을 만큼 살고 키도 크면서 인상도 좋고 몸도 튼튼하게 생긴 아버지는 평판이 좋았나 이웃에 사는 사람이 자기네 먼 친척이라며 중매했는데 그렇게 만난 것이 우리 엄마였다.
엄마도 역시 충청도 해안의 어부집 딸로 외모도 예쁘고 야무지게 생겨 맛 선을 보고 서로 첫눈에 마음이 들어 곧바로 결혼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결혼하자 마을에 있는 조그만 집을 한 채 장만하여 자기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고기잡이배와 같이 막내아들에게 주면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도록 살림을 내보냈단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 초에 단둘이 아주 재미나게 살림을 시작한 모양이다.
이런 우리 집에 우안이 드리워진 것은 내가 태어난 후부터라고 했다.
아버지는 은근히 아들 두기를 원했는데 첫 아이가 다운증후군이란 난치성 장애인인 여자아이가 태어나자 속으로는 실망이 컸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아버지는 별로 내색하지 않고 열심히 고기잡이에 열중했으며 언니의 병을 안쓰러워하며 재미있게 살았단다.
그러다 둘째도 딸인 내가 태어나자 둘째는 아들이겠지 하고 기대했는데 다시 딸을 낳아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아버지는 외갓집에 대한 불만을 조금씩 터트리기 시작했으며 술 마시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어머니와 다투는 일도 많아지게 되었단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소화가 잘 안 된다며 식욕이 감퇴되었나 먹는 것도 현찬아 지더니 체중이 점점 감소하면서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해 병원에 가서 진찰받아본 결과 췌장암 4기라고 했단다.
이렇게 췌장암이란 선고를 받은 후 고작 3개월 만에 돌아가셨다는데 그때 내 나이는 12살이고 언니는 15살로 초등학교 5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이런 아버지다 보니 나에게는 특별히 좋은 기억은 없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아버지의 기억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장날이라고 장에 갔다 오시다가 언니는 곰돌이 인형을 사다 주고 나에게는 토끼 인형을 사다 준 기억만 남아 있다.
그때 언니와 내가 인형을 가지고 친구들한테 인형을 사다 준 우리 아버지를 자랑하면서 다닌 기억이 아직 남아 있다.
이런 아버지인데도 어머니는 늘 아버지를 그리워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