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붉은 주마등 13

日陵 2025. 10. 14. 17:22

 

 

그래서 할머니가 반대하는데도 딸을 위하여 고향의 살림살이를 정리하고 신림동으로 이사하여 언니는 특수학교로 진학하고 나는 일반 학교로 전학시켰다.

 

그리고 어머니는 시장통에서 이모네 식당 옆에다 좌판을 펴 놓고 채소 장사를 하면서 살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이렇게 채소 장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모네 식당에서 재료로 사용하는 채소를 주문할 때 어머니가 판매할 수 있는 채소도 같이 주문해다 줘서 어렵지 않게 장사를 할 수 있었다.

 

이모는 어머니보다 3살 어렸다.

외갓집은 충청남도 해변으로 사는 것도 별로였다.

어머니는 3남매의 큰딸로 위에는 고기잡이하는 오빠가 있고 아래로 이모 한 분이 있는데 이모와 어머니는 무척이나 가까웠다.

그러다 보니 이모부도 처형인 어머니를 좋아해서 그랬는지 장애인인 조카와 어린 딸을 데리고 사는 어머니가 안쓰러웠는지 자기 식당에서 사용할 채소를 사러 가서 어머니가 팔 수 있는 채소까지 사서 자기 차로 실어다 주었다.

 

서울로 이사 와서 처음에는 우리 집 식구들은 이모네 식당에서 저녁밥을 먹고 다녔다.

언니나 나는 학교가 끝나고 나면 이모네 식당으로 가서 간단하게 식사를 한 다음 어머니도 장사를 끝내고 세 사람이 같이 집으로 오곤 했다.

이때 어머니가 이모한테 밥값은 얼마나 처서 주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이모네 식당에서 밥을 먹고 다니는 것이 불편했다.

감수성이 예민한 여중 학생으로서 이모부와 이모에게 눈치가 보였으며 이종사촌 남동생이 둘이나 있었는데 그들도 실었다.

그 사촌 동생들은 시장통에서 자라서 그런지 시골에서 올라온 우리 자매를 얕잡아보는 눈치가 보였다.

 

처음 신림동으로 이사한 집은 언니가 다니는 특수학교가 옆에 있는 변두리로 남의 집 문간방 한 칸을 빌려서 살았는데 우리 식구는 거의 잠만 자는 집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내가 다니는 중학교가 집에서 멀리 떨어져 나는 시내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녀야 했다.

 

어머니도 언니 때문에 서울로 이사는 왔지만 자기 손아래인 동생 신세를 지는 것이 마음에 걸리고 우리가 어린 이종사촌들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을 느낀 모양이다.

이런 때 고향에다 두고 온 집이 팔렸다.

본래 아버지 재산이라고는 조그만 집 한 채와 배가 한 척 있었는데 배는 할머니가 자기가 아버지에게 사준 것이라고 팔지 못하게 하고 뺏어다가 큰아들에게 주었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는 그동안 조금 벌어 논 돈은 아버지 병원비로 다 써버려 거의 빈손으로 이사를 왔다가 얼마 안 되는 집이지만 팔려 돈이 들어오자 이사를 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두 번째로 이사한 집은 엄마가 장사하는 시장과 내가 다니는 중학교와 사이에 있는 곳으로 방이 두 칸인 단독주택 행랑채로 이사하게 되었다.

언니가 다니는 학교는 특수학교라 그런지 학교 버스가 있어 언니는 학교 버스를 타고 다녔다.

이곳으로 이사한 다음부터 나는 학교에서 끝나면 이모네 식당으로 가지 않고 집으로 곧장 왔으며 그때부터 저녁밥은 내가 준비했다.

그러나 언니는 혼자 집을 찾아올 수가 없어 어머니는 매일 학교 버스를 기다렸다 언니가 학교에서 오면 다시 장사하는 곳으로 데리고 같다가 와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어머니와 나는 열심히 살아왔다.

 

우리는 이 집에 이사 와서 언니보다 내가 먼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화장품회사에 취직하여 직장에 다니게 되었다.

그러다 언니가 고등학교 과정까지 마치자 다시 언니를 위하여 우리는 서울평생교육원이 있는 쪽으로 이사해서 살다가 나는 직장에서 선미 아빠를 만나 결혼하여 처음으로 어머니나 언니로부터 독립하여 살게 된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언니로부터 독립해서 서로 떨어져 산 것은 결혼한 후 이혼할 때까지 7년이었다.

이렇게 떨어져 살 때도 선미가 첫돌이 지나면서부터 어머니와 같이 살았기 때문에 나는 수시로 선미를 보러 언니가 사는 집을 들랑거려야 했다.

 

어머니는 언니가 평생교육원에서 다닐 수 있는 5년의 기간이 지나자 다시 언니가 취업한 장애인 직업재활센터가 있는 가까운 곳으로 이사했다.

언니가 직업재활센터에서 하는 일은 아주 단순한 일로 손톱깎이를 작은 종이상자에 10개씩 넣는 작업이었으며 월 보수는 30만 원 남짓 받았다.

이처럼 언니가 한 달간 벌어오는 돈이 고작 30만 원이었지만 어머니는 그 돈을 무척이나 크게 느끼고 있었으며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다 내가 이혼하고 선미를 데리고 들어오자 언니의 직업재활센터와 선미의 초등학교 그리고 내가 출·퇴근하기가 쉬운 신림동 지하철역 주변인 이 집으로 5년 전에 이사해서 같이 살고 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은 늘 언니를 위하여 이사했으며 시골에서 이곳 신림동으로 이사 와서 살게 된 지도 벌써 28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누가 나에게 당신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나는 분명 지금은 커다란 공장지대로 변한 시흥의 갯벌이라고 말하지 않고 지금 생활하고 있는 서울 관악구 신림동이라고 대답할 것 같았다.

그만큼 나에게는 신림동이 정이 들어 있는 곳이다.

이곳에 있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내 나름대로 곳곳이 정들어 있었다.

 

지난날의 기억을 생각하면서 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언니와 나는 어떤 인연으로 맺어진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들자

갑자기 스님의 말씀이 머릿속에 떠올라 마음속으로 순생 업으로 맺어진 인연이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언니가 다음 세상에서는 지금과 같이 가난하면서 외롭고 고달프게 살아가는 장애인이란 고통 속에서 벗어나 부잣집에 태어나 건강하고 활발하며 행복한 삶을 살 것이 아닌가? 하는 상상을 해 봤다.

 

이처럼 언니를 생각하고 있자니 언니와 있었던 지난 일들이 꼬리를 물고 지나갔다.

어린 시절 어린것들이 갯벌에 빠지며 조개를 줍겠다고 돌아다니다 옷과 얼굴에 갯벌의 흙은 범벅으로 묻히고 들어왔다고 어머니에게 직 사게 혼나고 수도 가에서 바가지로 물을 퍼서 씻겨주시던 어머니의 기억,

연탄불에다 아버지가 잡아 온 커다란 전어를 꼬챙이에 끼워서 입이 까만 줄도 모르고 호호 불며 구워 먹던 기억,

아버지가 소주를 드시며 잡수시던 개불을 징그럽다고 찡그리며 눈을 감고 받아먹던 것을 생각하니 몸이 으쓱하고 소름이 느껴지면서도 입속에서는 개불의 달콤한 맛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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