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보다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것은 서울에 이사 와서 얼마 안 되었을 때다.
그날 언니나 나는 학교에서 이모네 집으로 왔는데 저녁을 먹기 전에 갑자기 언니가 없어졌다.
그날 어머니가 파는 채소가 조금 덜 팔려 이모네 식당 옆에서 팔고 있고 나와 언니는 어머니가 저녁을 먹자고 할 때까지 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언니가 방에서 나가 나는 화장실을 가는 줄 알고 어데 가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언니가 방에서 나간 지 한참이 지나는데도 들어오지 않아 나는 어머니가 장사하는 곳으로 간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이종사촌들과 말장난을 치고 있었는데 언니가 없어진 것이다.
장사를 마치고 들어 온 어머니가 저녁을 먹자고 해서 식당에 나가 보니 어머니만 계셨다.
어머니도 방에서 나만 나오자
“언니는 왜 안 나와?” 해서
“언니 방에 없는데.” 하자
“언니 어데 갔는데?”
“엄마한테 안 갔어?”
그러자 어머니는 직감으로 언니가 없어진 것을 알아챈 모양이다.
“언니 언제 나가는데?” 하면서 놀라는 눈빛이었다.
그날 어머니와 나는 언니를 찾기 위하여 시장통을 돌고 또 돌며 그 한 시간을 헤매고 다녔다.
어머니는 길에서 장사하는 사람이나 지나가는 사람마다 붙잡고 언니를 물어보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날 언니는 화장실을 갔다가 어머니 장사하는 곳으로 가다 말고 길거리에서 울긋불긋한 고무풍선을 매달고 엿을 파는 품바 각설이 엿장수가 신기하게 보여서 따라갔는지 아니면 엿을 먹고 싶어서 따라갔는지 모르지만, 엿장수를 따라다니다 길을 잃은 모양이었다.
길을 잃고 헤맨 언니도 고생했지만, 언니를 찾기 위하여 어머니는 지나가는 사람마다 붙잡고 언니의 모습을 설명하면서 물어보던 모습이 어린 내 가슴에 너무 애처롭게 보였나 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그 사건이 일어난 후부터 언니는 어머니의 껌딱지가 되어 떨어지지 않고 붙어 다녔다.
그날 저녁 어머니는 얼마나 애를 태우셨나 저녁 식사도 거르고 넋 놓고 계신 것을 보고 나는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언니를 꼭 지켜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다.
오늘 내 앞에서 고통받고 있는 선미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때 당시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것 같았다.
그보다 서울로 이사 와서 가난하게 살면서도 봄이 되면 어머니는 언니와 나를 데리고 남산도 올라갔고 경복궁 벚꽃 구경도 시켜주었던 추억들이 한 편의 영화처럼 지나갔다.
그러다 어머니 모습이 떠오른다.
학교라고는 초등학교뿐이 안 나온 분인데 얼굴도 예뻤으며 그렇다고 누구에게 쉽게 지지 않는 당찬 면도 있었다.
어머니의 친정은 충청남도 태안의 해변 어촌마을에서 살아서 그런지 남편도 없이 지적장애인인 딸과 어린 딸을 데리고 시장에서 좌판을 펴 놓고 채소 장사를 했지만, 그 누구에게 굽신거리며 살지는 않았다.
그리고 딸들의 기를 살려 주겠다고 바쁘면서도 없는 살림에 쉬는 날이면 종종 서울 구경도 시켜주었으며 관악산 계곡 나들이도 수시로 다녔다.
한때는 이런 어머니를 나는 이해하지 못하고 원망도 많이 했다.
내가 시골에서 서울로 이사와 중학교 다닐 때 일이다.
다른 친구들은 옷도 잘 입고 멋을 부리며 학교도 아버지나 어머니가 자가용 차로 태워다 주고 태우고 가는데 나는 매일 남루한 옷을 입고 터벅터벅 걸어서 다니는 것이 창피하고 자존심이 상해 불만이었다.
그때마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가 원망스러웠고 혼자 장사하며 꾀죄죄하게 사는 엄마도 보기 싫었다.
서울로 이사 와서 얼마 안 된 중학교 2학년에 다닐 때 학교를 그만두고 집을 나가려고 한 적이 있었다.
나는 학교도 낯설고 이야기할 친구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고향의 친구들과 갯벌이 그리워지자 무조건 집에서 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있었나 보다.
시골의 조그만 학교에 다니다 서울의 큰 학교로 전학을 와서 그런지 쉽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학교에 가면 반 친구들의 활기찬 모습에 기가 죽어 처음에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친구들 눈치만 보면서 학교에 다녔다.
그런 나를 변하게 만든 것은 불량한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내가 어리숙하게 보였는지 만만하게 본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랬나 토요일 어느 날 학교에서 끝나고 시내버스를 타러 가는데 골목에서 같은 학년에 다니는 학생들로 별로 크지도 않은 세 아이가 나를 불렀다.
“야, 너 일루 와 봐.” 해서 눈치를 살피며 갔더니
“너 시골에서 전학해 왔다며, 어데서 왔니?” 해서 기가 죽어 말도 못 하고 바라만 보고 있는데
“너 벙어리니, 왜 대답도 못 해.”해서
“왜 그러는데?” 하고 대답하자, 다른 학생 하나가 눈을 부라리며
“이 촌것이, 어디서 말대꾸야.” 하면서 눈을 부라렸다.
그 학생 눈동자를 바라본 순간 나도 모르게 화가 났다. 그래서
“네가 뭔데.” 했더니 그 애는 느닷없이 내 볼기를 힘껏 올려붙였다.
순간 볼기짝을 맛은 나는 책가방을 집어던지고 그 아이의 머리채를 잡아당겨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러자 그 아이는 힘도 없이 땅바닥에 처박혔다.
그것을 보고 있던 두 아이가
“어, 이 시골뜨기가.” 하면서 달라붙는데 마침 그때 대학생같이 보이는 청년 두 사람이 저쪽에서 오다가 우리가 싸우는 것을 보고
“어 여학생들이 싸우네.” 하면서
“너희들 그만 안 둬” 하면서 소리 지르며 뛰어오자, 그 애들은 신속하게 도망쳤다.
그 사건이 있고 난 뒤 그 애들은 나를 건들지 못했다. 저희 생각은 시골에서 온 내가 만만하게 보인 모양인데 막상 건들어 보니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다.
사실 나는 친구들에게 그리 호락호락 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초등학교 다닐 때 장애인인 언니와 같이 다니면서 언니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있었나 언니를 놀리는 학생이 있으면 종종 싸운 적이 있었다.
이런 일이 일어나고 나서 서울 학생들에 대한 두려움은 없어졌으나 학교에 대한 정은 더 떨어져 집을 벗어났으면 하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집에서 나가면 누구랑 어데 가서 무엇을 하면서 살까? 하는 생각이 늘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그때 생각은 무조건 집을 나가면 우리 집에서 엄마나 언니와 같이 사는 것보다 행복하고 잘 살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