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붉은 주마등 17

日陵 2025. 10. 28. 07:18

 

 

덕수궁은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와 월산대군 저택과 그 주변 민가를 합하여 시어소로 정하여 행궁으로 삼았다.

이후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운궁이라고 했다. 그 후 인조반정을 겪으면서 규모가 축소되었고 즉조당과 석어당을 제외한 나머지는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그러다 고종 때 명성황후시해사건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덕수궁으로 환궁하게 되었으며. 또한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을 선포한 후 황궁으로서의 규모와 격식을 갖추게 되었는데, 그 후 덕수궁 대화재와 고종이 강제 퇴위 된 후 규모가 축소되고 이름을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바뀌게 되었다.”라고 설명해 줬다.

그러면서 어찌 보면 오늘날 우리나라 이름이 대한민국인데 이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에서 유래된 것으로 대한민국이 나타난 곳이 바로 이곳이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나는 그 사람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모르지만, 그저 행복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가 지적으로 보였으며 멋있어 보였다.

그때 나는 마음속으로 이 사람과 결혼해서 평생을 같이하면 여한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는 갑자기

 

은실 씨 내가 당신을 평생 모시고 살 수 있는 영광을 주시기 바랍니다.”하고 청혼했다.

나는 너무 뜻밖이라 당황하며

~”하고 말을 잊지 못하고 있자 그는

은실 씨 어머니와 언니는 우리 두 사람이 평생 모시고 삶읍시다.” 해서

나도 모르게

정말요. 지금 청혼하시는 거예요.” 하자

, 정식으로 청혼합니다.” 했다.

찬호 씨 저 같은 사람과 결혼해도 후회하지 않겠어요,” 나는 속으로는 가슴이 콩닥거리며 너무 행복했으나 입에서는 다른 말이 나왔다.

은실 씨 당신이 어때서요. 혹시 언니 때문에 그러시는 모양인데 어머니나 언니는 아무런 걱정을 하지 마세요. 나는 우리 집의 막내라 우리 부모는 형님이 모시니 나는 장모님을 모시고 살려고 합니다.” 해서, 나도 모르게

고마워요. 찬호 씨.” 하며 그에게 키스해 줬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서로 결혼을 승낙하게 되었는데 그는 나보다 나이가 한 살 더 많았다.

 

그 후 우리는 양가 부모님들에게 인사하고 결혼하게 되었는데 어머니는 결혼 후 찬호 씨가 같이 살자고 제안했지만, 완강히 거절하여 따로 살게 된 것이다.

그때 어머니는 언니로 늘 전전긍긍하며 살아가고 있는 나를 언니로부터 해방시켜주고 싶었던 모양인데 나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내가 이렇게 쉽게 결혼을 승낙한 이유는 그동안 어머니와 장애인인 언니와 같이 여자 세 사람만이 살다 보니 다른 사람의 정이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아버지와 일찍 헤어져 내 주변에는 남자가 없다 보니 남자의 정이 더 그리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은 고향이 강원도 삼척인데 부모님은 삼척에서 제법 큰 어선을 한 척 가지고 있었으며 네 남매 중 막내로 위에는 형과 누나가 두 사람이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려서부터 부모나 형과 누나들로부터 귀여움만 받고 자라서 그런지 하는 행동이 철부지였으며 무엇이든지 자기 고집대로만 하려고 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는데 나는 사랑에 빠져 그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우리는 서로 첫눈에 반해 버린 것이다.

남편은 나의 미모에 반해버렸고 나는 남편의 직장과 학력에 반한 모양이다.

감히 나 같은 가정환경에서 어떻게 대학을 나와 제대로 된 직장에 다니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신중히 생각하지 않고 덜렁 사랑에 빠져버렸는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아빠도 없고 고등학교만 나온 내가 이름있는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을 만나자 무척이나 기뻤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그가 하자는 대로 앞뒤를 재지 않고 결혼도 서둘러서 시켰으며 결혼하자 바로 우리는 새로운 살림을 차렸다.

 

내가 결혼하여 집을 나가자 어머니와 언니는 다시 옛날로 돌아갔다. 다시 어머니와 언니만 사는 장애인 모녀가정이 된 것이다.

 

나는 직장생활과 결혼의 행복감에 도취 되어 어머니와 언니의 생활에 대해서는 한동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어머니도 어려서부터 장애인 언니를 돌보면서 고생하며 살아온 나에게 더는 고통을 주기 싫었는지 자기들의 생활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나의 결혼생활이 조금이라도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데 만 신경을 쓰신 모양이다.

 

그러나 내가 전생에 무슨 죄가 그렇게 많이 지었는지 이런 행복도 오래가지 못하고 바로 파탄이 났다.

연애할 때 삼척에 있는 시댁에 찾아가 시부모에게 인사드려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시부모님은 내 미모에 좋은 인상을 받았나 처음에는 반갑게 맞아 주셨다. 그러나 그때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시어머니가

식구가 몇 사람인가?”라고 물어

어머니와 언니 그리고 저랑 세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하자

아버지가 안 계시고?” 해서

, 아버지는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하자

아니, 어쩐 일로?”

그때 저는 어려서 잘 몰랐는데 어른들 말로는 암이라고 한 것 같아요.” 하자 시부모님들의 낮 끝이 조금 변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때 남편 될 사람이

어머니 이야기는 다음에 하시지요, 나 지금 은실이와 가볼 데가 있는데?” 하며 대화를 중단시키고 나를 데리고 삼척 해변에 있는 삼척해상케이블카를 탄 다음 삼척 해변을 산책한 적이 있었다.

이때 어머니가 나를 업신여긴다는 눈치를 느꼈지만, 동해안의 아름다운 삼척 해변에 도취 되어 바로 잊고 말았다.

 

그러다 결혼식 때 신부 측 하객이 거의 없었다.

거기다 가족이라고 해야 어머니와 장애인인 금실이 언니가 있었으며, 친가에서는 어머니를 못마땅하게 생각해서 그런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외가에서 외삼촌네 가족 내외와 이모네 식구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집이 어머니와 장애인 언니 그리고 나 등 여자만 세 사람이 산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 뒤부터 시부모는 물론 시집 식구들 모두 나를 완전히 업신여기는 눈치를 보였다.

 

어떻게 보면 사람 사는 사회에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시아버지는 비록 큰 어선은 아니었지만, 일반 어부들이 가지고 있는 어선 중에서는 제법 큰 어선을 가지고 있었으며 큰아들 부부는 삼척에서 약국을 경영하는 약사 부부였다.

그리고 손위 시누이는 초등학교 교사로 남편도 고등학교 교사인 부부 교사로 강릉에 살고 있었다.

또 아래 손위 시누이는 삼척 어시장에서 제법 큰 어물 가계를 하는 집 큰 며느리로 시어머니와 같이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지방의 조그마한 해안 도시에 살고 있지만 먹을 만큼 사는 사람들로 지방에서는 목에다 힘깨나 주고 사는 사람들로 보였다.

 

내가 결혼하고 첫 번째 명절날인 설날 인사를 갔을 때다.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해보자고 직장에서 서둘러 퇴근하여 첫 시댁 나들이라고 시부모는 물론 시댁 시구들의 선물이라고 나름대로 허리띠를 졸라매면 준비해 갔는데 내 선물을 본 시어머니는 시큰둥했다.

 

시어미가 나에게 보인 태도는 가난한 집에서 큰 사람이라 보는 눈이 없다는 식으로 내가 사다 준 선물들을 풀어보지도 않고 한쪽 귀퉁이다 처박아 버렸다.

그것을 본 나는 시집살이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 내가 남편보고 결혼한 것이지 시어머니 보고 결혼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며 웃어 넘기 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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