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데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아침 차례상을 차리는데 지금까지 내가 나이를 먹으면서 차례상 차리는 것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어려서 아버지와 같이 명절날 어머니가 새로 사다 준 예쁜 옷과 새 양발을 꺼내 신고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같은 마을에 사는 할아버지네 집에 가서 절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은 기억밖에 없다.
그러다 서울에 이사 와서는 명절이 되면 어머니는 간단하게 떡 한 접시와 사과 배 등 과일 몇 가지를 준비해 오셨다.
그리고 부치기는 꼭 손수 배추 부치기를 서너 장 부치고 막걸리를 한 통 사다 아버지에게 제사를 올리도록 했다.
그때마다 내가 제주가 되어 향에 불을 피우고 어머니가 술을 따라주면 상에다 올려놓고 나와 언니는 절을 하곤 했는데 제대로 맞게 했는지도 모르고 그마저도 몇 년이 흐르자 하지 않았다.
다만 명절이 돌아오면 어머니는 언니와 나를 위하여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곤 했다.
그런데 시집을 와서 보니 이 집은 제대로 차례상을 차리는 집이었다.
시부모와 시숙네 내외는 물론 시아버지 형제 되시는 분도 두 분이나 왔다.
그러다 보니 음식 장만하는 것도 요란했다.
손위 동서는 여러 해 일을 치러봐서 그런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척척 잘하는데 나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주방에서 얼씬거리는 사람이 되어 멀거니 서 있다 손위 동서가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이런 것들이 시어머니 눈에는 하나의 가시로 보인 모양이다.
아침 차례가 끝나고 모두 시부모에게 세배를 드리는데 그만 실수하고 말았다.
나는 나이를 먹으면서 큰 절이란 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결혼식 때도 폐백을 드리는데 옆에서 시누들 손을 잡고 시키는 대로 하기는 했지만 어떻게 했는지 정신없이 지나갔는데 이제는 그때와는 달랐다.
그러다 보니 시부모에게 큰절하는데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절하고 일어서다가 그만 넘어지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나는 무안하여 얼굴이 화근거리는 데
옆에서 그것을 본 유치원에 다니는 시조카가 큰소리로 웃으며
“작은엄마는 절도 잘 못 하나 봐” 했다.
여기다 대고 시어머니가
“본디가 있어야 보고 배운 것이 있지?” 하며 혀를 찼다.
그러자 초등학교 2학년에 다니는 시조카가
“할머니 본디가 무어야.” 하자 동서는 내 눈치를 보며
“너는 몰라도 돼.” 하며 말을 막았다.
그때 얼마나 무안했는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명절 오후에 출가한 시누이들이 자기 아이들과 시부모께 인사하러 와서 하룻밤씩 잠을 자며 놀다 가는데 나는 완전히 그 집의 부엌데기가 된 것이다.
동서는 시부모께 세배를 드리고 나자 점심 식사 때부터는 나 보고 식구들 식사를 챙겨 주라고 하면서 자기네 부부는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인사한다며 가버렸다.
혼자 시부모와 시누이 식구들 치다꺼리를 해 주다 보니 내 인생이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어렵게 키워 시집을 보낸 우리 어머니는 명절이라고 장애인인 언니와 무엇을 해 드셨는지도 모르는데?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동서와 시누이들은 다 자기 부모들에게 인사한다고 가고 오고 하는데 나는 어머니를 두고도 가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 뒤치다꺼리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속에서 열불이 났다.
그래서 하룻밤만 자고 나도 친정에 가야겠다고 남편을 꼬드겨 시부모에게는 회사에 바쁜 일이 있다고 거짓말하고 집으로 온 적이 이었다.
그때 집에 와서 남편과 한바탕 단단히 했다.
내가 그 집 부엌데기도 아닌데 부엌데기 취급을 한다며 헤퍼 붙었다.
이렇게 되자 시댁에 가는 것이 마음에 부담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시댁에 가는 일이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우리가 시댁에 가는 날은 부모님 생신 때와 명절뿐인데 그것도 어떤 때는 회사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나는 내려가지 않고 남편만 고향을 다녀오도록 하기도 했다.
그러다 우리가 첫 아이로 딸인 선미를 해산하자 시어머니는 나에게 아들 하나 더 낳으라고 권하는데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다시 남편에게 손자 보기를 원한 모양인데 남편도 내가 반대하자 대답하지 못하고 내 눈치만 살피고 있는 꼴이 되었다.
사실 시어머니는 큰아들이 딸만 둘을 두고 있어서 자기들 대를 이어 줄 손자를 작은아들이라도 낳아 주었으면 한 모양인데 나는 아들에 대한 욕망이 전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시댁으로부터 친정도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부모의 말도 잘 듣지 않고 고집만 부리는 시건방진 며느리라고 미운털이 박힌 며느리가 된 모양이다.
사실 우리 부부는 두 사람 다 직장 일이 바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선미는 가난하게 사는 친정어머니가 혼자 도맡아서 키우고 있었다.
이런데도 친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이를 돌봐 준다는 말은 하지 않고 아들만 하나 더 낳기를 원하니 나는 나대로 불만이 점점 쌓여갔다..
그러자 남편은 나보고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아이나 보라고 하는데 나는 그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나는 어려서부터 가난한 홀어머니 밑에서 장애인인 언니와 같이 살아서 그런지 모르지만 나도 모르게 내 또래들보다 자립심이 강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어떤 일이 있어도 죽을 때까지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자리를 가지고 있어야, 혼자 외롭게 살아가고 있는 어머니와 장애인인 금실이 언니를 보살펴 줄 수 있다는 의무감 같은 생각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살고 있었다.
이렇게 아이 문제로 남편과 갈등이 생기는 과정에서 어머니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어느 날부터 무릎 관절이 안 좋아 장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고생하면서 생활이 쪼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나에게 그런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참으며 살고 계셨다.
어느 날 저녁때 모처럼 어머니 집 옆을 지나다 마침 시간이 있어 예고도 없이 찾아간 적이 있다.
집에 들어가 보니 어머니는 잠깐 이웃에 가셨다고 보이지 않고 금실이 언니와 선미만 있는데.
금실이 언니와 선미는 나를 보자 무척이나 반갑게 대하며.
“어 은실이 왔네.” 하고
“엄마, 할머니는 없는데.” 하며 선미는 내가 어머니를 만나러 온 줄 알고 어머니가 없다는 말부터 했다.